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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빽지 Jan 28. 2022

체계는 어디에?

광고기획자의 회의감 : ⑦ 내적갈등

1년. 다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그동안 같은 광고 직종에서 이직도 있었고 삶에 여러 변화가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회사를 경험하면서 처음 진중하게 생각해본 체계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체계? 필요해?

기존에는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체계가 잡힌 곳보다 자유분방함 속에서 개인화를 일궈내어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우린 모두 회사가 1을 주든 100을 주든 "우리 회사는 체계가 부족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투덜이라서 괜히 체계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염치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다.


소위 체계가 잘 잡힌 회사에 다니는 지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할 수 있는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되지만 눈과 귀가 멀고 톱니바퀴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왕왕 들었다. 외부에서 비치는 광고회사라는 이미지와 적어도 내가 다니는 광고회사만큼은 체계보다는 서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개개인의 역량을 서로를 위해 쓰며 '팀'답게 움직이는 것을 바랐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 간의 대화를 단절시켜놓은 것처럼 체계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죽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체계를 마주하다

새로운 회사에 이직을 하게 되고 처음으로 거대한 체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본부나 팀 단위의 체계가 아닌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 자체의 체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매번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안서가 템플릿처럼 정형화된 것. 기승전결부터 레이아웃, 톤앤매너, 전문적 용어, 강조 포인트 등이 정해져 있었다. 또한 방향이나 논리보다는 테마(회사마다 불려지는 이름은 다르다)에 엄청난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대혼란이었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덜 중요하게 되었으니까.


제작팀이나 다른 부서와 일할 경우도 마찬가지. 정해진 테마와 러프한 방향만 브리프를 통해 이야기하면 그 이후엔 십중팔구 추가적인 의논 자리는 없다. 윗사람의 컨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실무진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 제안서 마감 전날에야 그들의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 PM이 좋든 싫든 가야 한다.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가 아니라 현재 일을 끝내기 위해 잠시 함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자의 역할만을 충실히 할 뿐 서로 머리를 맞댈 관계가 되지 못한다. 때문에 기획이 제작일에 관여하는 것은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아닌 그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꼴이 된다.


서로가 의논할 자리를 마련하고 상황에 맞게 대처하며 방향에 따라 의도를 수정하고 모두가 100%는 안되지만 끄덕거릴 수 있는 결과물을 내는 것.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책임감이라도 가질 테니까. 개개인의 납득과 인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회사라는 거대한 체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마땅한 대상도,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변화한 상황을 되돌아본다.


체계의 장점

새 회사를 경험하기 전 서로가 "우린 팀이야"를 외치며 결과야 어찌 됐든 좋은 과정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나날. 책임감은 하늘을 찔렀고 결과까지 좋으면 성취감은 치킨보다 맛있었다. 새 회사를 경험한 후 이러한 과정들이 간소화되다 보니 책임감은 개나 주게 되었고 결과가 좋아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것에서 여유가 찾아왔다.


첫째, 유기적으로 으쌰으쌰 한다고 모든 상황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건 아니다. 다음날이 되면 전날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던 경우들이 허다한데,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느라 야근하는 경우가 확 줄었다. 각자가 해야 할 역할만을 하면 되었기에 효율적인 시간관리가 가능해졌다.


둘째, 진행하고 있는 실무와 광고주 케어에 더 많은 공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제안을 하는 경우 날밤 새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기존 일에 대한 케어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야근을 안 하게 되니 선순환이 작용되었다.


셋째, 책임감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전에 썼던 글에도 있지만 책임감을 굉장히 중시했다. 하지만 뭐든 집착하면 병이 되듯이 책임감은 스스로를 옥죄는 것이었는데 이젠 통제 가능한 부분이 되었다. 책임감이라는 집착이 사라지니 일과 사람을 더욱 다방면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


아직도 체계에 대해서 무엇이 나와 스타일이 맞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도 니꺼내꺼 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의 역량을 하모니 낼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체계를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새 회사를 때려치우고 최근 다른 새 회사로 또 이직을 했다.


방향? 논리? 흐름?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과연 광고주도 그것을 중요하게 볼까? 모두가 그럴싸하게 맞는 이야기만 하니까 그중에서 고르자면 더 임팩트 있는 테마, 더 기깔나는 크리에이티브라는 결과물을 고르지 않을까 한다. 그 회사는 수백수천 번에 제안 끝에 무엇이 중헌지를 알고 정형화된 템플릿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족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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