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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Nov 05. 2018

<청설 聽說 Hear Me>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는 물새처럼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누군가 나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고통이 될 때가 있다. 그저 희망하는 것이 아닌 당위를 부여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 기대가 내가 원하는 것일지라도 심적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가족 간에 쉽게 실수하는 지점이다. 어떤 성취에 대해 나의 기대보다 가족의 기대가 높을 때 혹은 가족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 “다 널 위해서야”라는 말은 어느 순간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영화 <청설>은 그러한 폭력이 한 자매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언니의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려는 동생과 동생의 희생으로 꿈을 향한 헤엄치기를 멈출 수 없는 언니는 어느덧 자신의 꿈보다 상대방의 꿈 때문에 괴로워한다. 영화 속 큰 흐름은 아니지만, 자매의 삶과 갈등 속에 담긴 메시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스무 살 청년 티엔커(펑위옌)은 수영장에 점심 도시락을 배달하다 청각장애인 수영선수 샤오펑(천옌시)의 동생인 양양(진의함)에게 첫눈에 반한다. 수화를 할 줄 아는 티엔커는 양양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어느 날, 양양은 티엔커와 데이트를 하던 중 언니 샤오펑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는 동안 화재가 발생해 연기를 마신 것. 이후 양양은 언니를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티엔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언니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어


청각장애인인 언니 샤오펑은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수영선수다. 동생 양양과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전도사로 활동하며 현재 아프리카에 있다. 양양은 아버지가 떠나기 전 “언니를 내가 잘 보살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후 양양은 길거리에서 마임을 하며 돈을 번다. ‘아르바이트’라고 말하지만 실제론 ‘버스킹’이다. 돈을 못 버는 날도 있다. 그렇게 번 돈은 고스란히 생활비가 된다. 언니가 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양양은 무한히 희생하고 자신을 억누른다.

양양에게 티엔커의 애정공세는 억눌렸던 감정의 일탈을 불러일으킨다. 이전에 양양에게는 독립적인 행복이 없었다. 언니의 훈련으로 인한 빚을 갚는 것, 언니가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양양의 꿈이었다. 아르바이트마저도 표정이 전혀 없는 마임을 하던 양양이었다. 티엔커는 양양의 삶에 미소를 일으킬 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틈은 자매의 삶에 균열을 냈다. 티엔커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언니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샤오펑은 습관적으로 훈련 때마다 응원하던 동생을 찾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없다. 양양은 즐겁지만 죄책감에 휩싸인다.


넌 형제 없지?
부모님 사랑 많이 받았겠다.


양양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외아들 티엔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양양, 샤오펑 자매의 갈등은 어쩌면 부모님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청각장애인인 언니는 동생보다 신체적인 약자이며 사회적 배려 필요한 존재다. 언니를 보살피는 일이 부모님에서 동생에게 위임된 것.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양양은 부모가 아님에도 부모와 같은 희생을 강요받고 있었다. 티엔커가 양양의 집에 찾아갔을 때, 양양은 언니의 수영대회 수상 트로피를 자랑한다. 마치 자신이 상을 탄 것 마냥. 언니의 성취가 자신의 희망이 된 것이다.


왜 내 꿈을 훔쳐?
날 통해 성취하려 하지마.


결국 폭발한다. 샤오펑은 동생에게 울분을 토했다. 동생이 온 인생을 자신에게 바치고 있지만 자신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동생의 말이 정말 자신을 위한 말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난 평생 금메달을 딸 수 없어”라고 속마음을 내보인다. 처음엔 나를 위한 목표였지만 어느새 동생의 목표를 위해 뛰고 있던 자신을 발견한 것. 두 사람은 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영화 <말아톤>에는 <청설>의 양양과 같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말아톤>은 자폐증 소년 소원(조승우)이 마라톤을 통해 성장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엄마 경미(김미숙)는 아들 소원이 마라톤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도 강박적인 애착을 보인다. 어느새 경미의 목표는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라톤 자체에 집중된다. 아들의 마라톤이 엄마의 성취를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마라톤 코치가 이를 지적하자 경미는 초원에게 마라톤을 그만두라고 한다. 하지만 초원은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면서 손을 붙잡은 엄마에게 “초원이 다리는?”이라고 묻는다. “백만 불짜리 다리”라는 엄마의 답을 들은 초원이는 엄마의 손을 놓고 수많은 선수들 사이로 사라진다.

언니 꿈이 내 꿈이야.


관계는 다르지만 <말아톤> 속 경미와 <청설> 속 양양은 가족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문제는 정도의 차이로 발생하지 않는가. 두 사람의 행동은 초점을 잃은 과도한 희생이 다른 가족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설>은 매우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저 가족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것.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믿어주는 일 역시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한 일인가. 이를 위해 언니 샤오펑은 훈련비용을 스스로 벌기 위해 수영장 코치일, 청소부일 등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티엔커와의 데이트를 망설이는 동생에게 말한다. 


물새는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
난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언젠가 날 떠나서 물새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면 좋을 것 같아.
내 독립을 믿어준다는 의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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