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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Apr 07. 2019

X나 최선을 다한 정치 유머

영화 <바이스, Vice> 2018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여행 첫날 비가 왔다. 혼자 계획하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탓할 사람도 없었다. 비가 쏟아지자 가족들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이에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하필 여행 첫날 비가 오다니"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전 직장에서 말을 함부로 해서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과 단 둘이 밥을 먹게 된 적이 있다. 함께 하지 못한 동료들은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오붓하게 욕먹고 올게요.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반어적 표현에 동료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은 내려놓고 그저 웃긴 상황으로 보기 시작했다.
반어법은 우울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유발한다. 같은 상황을 다른 기운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여행지에서 내리는 비, 불편한 사람과의 식사자리 등의 부정적인 상황을 말 한마디로 낄낄댈 수 있는 분위기로 바꿔버린다.  영화 <바이스>는 반어법을 시나리오 전반에 깔고 있다. 다소 무겁고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특유의 톤으로 끌고 간다. 권력에 눈이 먼 정치인들의 역겨운 행동들을 우습게 만들어 관객들을 몰입하게 하고 그들이 켜켜이 쌓은 더러운 부패들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게 한다.
딕 체니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찬 베일/사진=영화 <바이스>
예일대에서 두 번 낙제한 술주정뱅이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는 아내 린 체니(에이미 애덤스)의 성화에 정신을 차린다. 국회 인턴으로 시작한 딕 체니는 11년 만에 최연소 백악관 수석이 된다. 이후 국방부 장관, 민간 군사기업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다.

어느 날, 역대 가장 한심한 대통령이 될 '아들 부시' 조지 W 부시(샘 록웰)는 딕 체니에게 부통령 자리를 제안한다. 딕 체니는 이에  "판을 좀 다르게 짠다면.."이라며 국방을 비롯한 행정권 상당수를 달라고 역제안을 한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사람


딕 체니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대통령 조지 W 부시를 보좌한 미국 제46대 부통령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가 국회 인턴을 시작으로 최연소 수석 보좌관이 되기까지 불과 1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라고 불린다. 딕 체니를 연기한 배우 크리스찬 베일은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기술을 배우고 세계 정치 지형을 바꾼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평가는 상당히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바이스'(악덕)한 '바이스'(부통령)라는 영화 제목에 담긴 메시지도 포함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악덕했는지는 부통령이 된 이후 펼쳐진다. 마치 용수철처럼 전권을 가질 때까지 권력의 시녀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는 허리를 펴기 시작한다. "헌신적이고 겸손한 권력의 시종이 될 것"이라며 훗날 국방부 장관이 될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카렐)의 충견이던 그는 부통령 제안에 본색을 드러낸다. "러닝메이트가 돼달라"는 부시에게 "관료들 관리 감독, 군 지휘권, 에너지 자원 관리와 외교 정책까지…"라며 대통령의 핵심 권한들을 받아낸다. 이후 대통령 부시와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은 그의 꼭두각시에 불과해진다.

우리는 X나 최선을 다했다
(But we did our fxxking best)


<바이스>의 정치 문제는 무겁다. 복잡한 정치 용어와 시대적 배경이 담겨있다. 딕 체니가 도넛을 쩝쩝거리며 내린 결정에 이라크가 폭격당하고 이라크군 포로들에 대한 극악무도한 고문까지 이어진다. 이 불편한 이야기를 웃으며 볼 수 있는 이유는 특유의 ‘톤’ 덕분이다.   "딕 체니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라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X나 최선을 다했다"라고 반어적으로 시작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떤 시선을 봐야 하는지 정해준다.


그 반어적 '톤'은 독특한 연출과 편집으로 배가 된다. 부시가 무모한 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장면과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 딕이 참모진들과 식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식당 지배인은 '오늘의 스페셜 메뉴'라며 적군에 대한 고문, 전쟁권한법, 영토 통제권 등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된 풀코스를 소개한다. 그들은 태연하게 해당 메뉴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웃으며 주문한다. 이 장면은 그들의 선택이 가져오는 심각성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딕이 국가시스템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부각한다. 영화 중반부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도 마찬가지다. 대권주자로 나서지 않고 동성애자인 딸을 보호하기로 택하면서 영화가 끝난 듯 배우들의 이름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딕이 정치를 거기까지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감독의 바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영화의 반어적 톤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몸무게 20kg을 증량하고 삭발을 감행했다. 실제 딕의 20대부터 70대까지를 연기하기 위해 특수 분장은 물론 제스처와 걸음걸이도 바꿨다. 목소리도 상당히 흡사하다. 다만 크리스찬 베일이 흥분할수록 <다크 나이트> 속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덕분에 크리스찬 베일은 <바이스>로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분 남우주연상을, 그레그 캐놈을 비롯한 분장팀은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분장상을 수상했다.

해산물 스튜는 절대 주문하지 말라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연출이었을까. 사회를 보는 날카로운 시선 없는 풍자는 웃음을 유발하기 어렵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전작 <빅쇼트>에서 2008년 부동산 대출 시장이 무너지고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했던 미국 금융위기를 재구성하고 재치 있는 연출을 더해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예컨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배우 마고 로비가 거품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는 설명했다. 거품 목욕은 버블 경제에 대한 은유였다. 자산담보부증권(CDO)은  스튜 요리에 비유했다. 한 요리 연구가의 회고록에서 "해산물 스튜는 절대 주문하지 말라. 팔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넣고 요리하기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너무 진보적이잖아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정치적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쿠키영상을 통해 이를 말한다. 포커스 그룹 인터뷰(Focus Group Interview)에서 한 참석자는 카메라를 뚫어져라 보며 "너무 진보적 관점이야"라고 말한다. 다른 참석자가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잖아"라고 반박하자 그는 "너 좌파 빨갱이(lib-tard)지?"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나는 사실에 대해 말한 건데 그게 진보적으로 보였나 보네", "너 힐러리 지지하는 사람이지?" 등의 공격적인 말을 주고받다가 두 사람은 주먹다툼까지 한다.


이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영화 <분노의 질주> 속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라고 관계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영화의 메시지와 달리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삶에 큰 변화가 없을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부정적 상황을 낄낄댈 수 있는 분위기로 전환한다. 무거운 메시지를 특유의 반어법과 유머로 소화해 관객들의 뇌리에 새겨 넣는 애덤 멕케이 감독의 능력이 발휘된 장면이다. 감독은 반어적 표현의 진수를 보여줬던 전작  <빅쇼트> 초반에 미국 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의 명언을 인용해 엘리트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비판한 바 있다. 감독의 매력적인 연출 방식을 치켜세우며 마크 트웨인의 또 다른 경구를 곱씹는다.


인류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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