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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Feb 29. 2020

우리의 진짜 적은 누구인가

영화 <쓰리 빌보드> 리뷰(결말, 해석), 코로나19 사태와의 관계

이건 다 네 탓이야


친구가 짜증을 냈다. 예상보다 오랜 시간 걸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팠겠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강을 건너 부다왕궁을 구경하러 가기 위해서 걷고 있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걸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친구는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설득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멀었다. 둘 다 초행길이라 예상할 수 없던 상황이다. '네 탓’은 걷자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질문이었다.
너도 알겠다고 했잖아


파국이다. 서로를 탓하기 시작하면 함께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여행이란 언제나 낯선 것과 만나는 일인데, 예상한 범위 내의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서로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라니.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불안해진 것에 대해 탓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친구에게 "아까 숙소 프런트 직원이 가깝다고 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짜증의 화살 방향이 바뀌었다. 맞다. 이 모든 책임은 숙소 직원 때문이다.
나쁜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다. 적을 만들면 복잡한 관계와 상황은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숙소 직원을 적으로 만드는 순간 여행은 다시 이어졌다. 여행을 위해 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적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 개의 광고판(three billboard)이 세워지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다. 각자 자신만의 적을 설정하고 책임의 화살을 겨눈다. 그런데 그 화살들이 이따금씩 빗나가기 시작한다. 과연 누구에게 어떤 적이 필요한 것인가.

영화 <쓰리 빌보드>(원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는 '현대판 셰익스피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각본을 집필해온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2018년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영화로 밀드레드 역의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여우주연상을, 딕슨 역의 샘 록웰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 등 4관왕, 영국 아카데미 5관왕 등 그 해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딸 안젤라를 참혹하게 살해된 범인이 수개월째 잡히지 않자 마을 외곽에 위치한 광고판 3개에 3줄의 문장을 게시한다.

도발적인 문구는 관할 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광고판에 이름이 명시된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부하 딕슨(샘 록웰)과 함께 광고회사와 밀드레드를 찾아가 빌보드를 내릴 것을 회유한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물러서지 않고 경찰의 수사를 거듭 촉구한다.

광고판이 알려지면서 무능한 경찰들을 비난하는 시선과 함께 조용한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밀드레드를 비난하는 시선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스포일러 주의



죽으면서 강간당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서장 윌러비?



영화의 시작은 3개의 광고판이다. '죽으면서 강간당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서장 윌러비?'라는 3개의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광고판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밀드레드의 딸이 살해된 지 7개월 이상 지난 상태다. 광고판만 봐서는 딸의 죽음이 마치 경찰서장의 잘못인 듯 실명이 적혀있다. 밀드레드는 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경찰서장으로 옮긴 것이다. 그 순간 밀드레드의 적은 경찰서장이다.


영화는 '진짜 적'을 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분노에 휘감겨 진짜 적은 잊어버린 채 서로를 적 삼은 사람들, 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일에 집착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진짜 적은 누구인지' 묻는다. 극중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밀드레드와 딕슨을 중심으로 이들의 분노가 어떤 적에게 어떻게 표출되는지 보여준다.


나는 강간당하고 말 거야!


먼저 밀드레드는 누구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강력한 여성 캐릭터다. 그런 그에게도 딸의 사망은 삶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나는 강간당하고 말 거야"라고 반항하던 딸의 말에 "그러길 바란다"라고 소리친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충격과 분노, 불안함, 죄책감을 해결하려면 적이 필요하다고 느낀 듯, 계속해서 감정의 화살을 겨눌 적을 설정한다. 처음엔 범인이 적이었을 것이다. 그 불 같은 분노는 경찰서장까지 옮겨 붙었다. 수사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밀드레드는 경찰서장을 적으로 정했다. 이는 3개의 광고판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췌장암을 앓고 있던 윌러비 서장이 자살한 것이다. 적이 사라졌다. 이후 밀드레드는 경찰서를 불태우는 등 다른 적을 설정하고 분노를 표출하지만 이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밝혀진다. 잘못된 적 설정의 연속이다. 윌러비의 자살은 광고판과 무관하지만 많은 이웃주민들은 광고판이 원인이라 생각하며 그 광고판을 세운 밀드레드 적으로 삼는다. 적을 퇴치하려다 모두의 적이 된 꼴이다. 윌러비 서장의 부인 역시 밀드레드에게 분노한다. 그중 가장 분노한 사람은 윌러비 서장의 부하 딕슨이다.

아무도 널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야기는 딕슨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고 폭력적인 경찰이다. 인종차별은 미국 남부라는 지역적 특성과 어머니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광고판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의 무시를 받고 있다. 자신이 동성애자인 점도 열등감으로 작용한다.


윌러비가 사후 편지에서 "아무도 널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위로하고, 그의 엄마가 "여자 만나러 가냐"라며 놀리는 장면, 오스카 와일드와 아바가 언급되는 점 등이 그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광고업자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이 동성애자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유색인종과 성소수자를 적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봤지? 나는 백인도 때려


그런 딕슨에게 존경하던 윌러비의 자살은 적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는 기절을 할 정도로 윌러비의 사망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이웃주민들과 달리 광고판을 세운 밀드레드가 아닌 광고판을 판매한 광고업자를 적으로 삼는다. 광고가 달린 이유가 자신이 담당한 사건의 범인을 아직 검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온데간데없다. 광고업자의 사무실에 찾아가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업자를 두들겨 패면서 "나는 백인도 때려"라고 발언하는 것을 통해 그의 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진짜 적은 누구인가


진짜 적은 누구인가.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분노의 손가락질 가운데 진짜 적은 보이지 않는다. 밀드레드의 딸을 강간하고 살해한 진짜 적은 어느새 장외로 사라졌다. 적 설정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밀드레드의 적 설정은 췌장암을 앓던 윌러비를 괴롭혔고, 경찰서를 불태웠다. 딕슨의 적 설정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이 폭행당하고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현실세계는 어떠한가. 진짜 적이 보이지 않을 때, 서로를 적으로 삼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모습은 관객들을 현실과 마주하게 한다. 여행 중에 친구와 생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숙소 직원'이라는 적이 필요했던 일처럼 말이다. 이러한 임시로 설정한 적은 감정적 불안을 해소하는 일에 효과적이다. 하지만 진짜 적을 잊게 만들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쓰리 빌보드>는 미국 미주리 주(州) 외곽의 에빙이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트럼프 시대를 사는 미국 사회의 한 풍경을 풍자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백인우월주의와 자본만능주의, 성소수자 혐오, 성차별 등이 여전히 만연한 사회라는 점을 영화는 꼬집는 듯하다. 각종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보여주지만 직접 그 차별을 만들고 조장했던 자들은 책임지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책임져야할 사람이 링 밖을 떠났음에도 피해자들끼리 남아 링 위에서 주먹을 날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적 피해자인 밀드레드와 딕슨이 끊임없이 적을 설정해야 하는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도 마찬가지 아닌가.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각자의 적을 정하기 바쁘다. 밀드레드를 살해한 범인은 사라지고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 각종 사회적 차별이 극심한 미국의 상황과 연결된다. 사태가 지속될수록 '진짜 적'인 바이러스는 온데간데없다.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종교, 특정 정당을 넘어 특정 인물까지 적 삼아 분노를 표출하는 데 급급하다.


진짜 적은 누구인가. 윌러비 서장은 세 장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광고판을 단 밀드레드에게, 그리고 부하 딕슨에게. 이중 딕슨에게 보낸 편지는 진짜 적을 보지 못하고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네가 증오를 계속 붙잡고 있는 한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라 생각해. 네가 이 말을 하면 질겁하겠지. 그런데 정말 필요한 건 사랑이야.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차분하고, 차분해져야만 생각할 수 있거든.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게 필요할 거야. 총도 필요 없고, 분노할 필요도 없어.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차분함은 할 수 있어."


이 편지 이후로 딕슨은 진짜 적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밀드레드와 화해하고 연대한다. 적을 처치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이 적을 향해 함께 가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인 이유는 적을 처치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연대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진짜 적에 대항하고 있나. 연대하고 있나. 점점 더 서로를 탓하고 있진 않은가. 윌러비 서장이 사망한 뒤 새로 부임한 서장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는 듯하다. 광고판이 방화로 인해 모두 불에 탄 모습을 보고 허탈해하는 밀드레드에게 새로 부임한 서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적이 아니에요,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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