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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Apr 01. 2021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아름다운 마찰음

영화 <미나리> 리뷰(해석, 결말)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엄마는, 커피가 아니라 물이 필요해


어릴 때 들었던 말이다. 아버지와 싸운 뒤 엄마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먹을 걸 사서 들어왔을 때였다. 엄마는 화를 냈다. 그걸 그 돈 주고 왜 샀냐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줘야지, 커피는 소용이 없다고.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한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도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에 샀겠지. 하지만 부정적인 반응에 화가 났을 거다. 다툼은 항상 그렇게 시작됐다. 제 3자가 보기에 이상적인 걸 주더라도 현실과 맞닿지 않으면 쓸모없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걸 어린 나는 깨우쳤다.
영화 <미나리>에는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등장한다. 낯선 곳에서 먼 미래의 꿈을 키우는 아버지, 그리고 당장의 현실이 고달픈 엄마. 둘의 갈등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아들, 딸 그리고 할머니가 있다. 


1980년대, 한국인 이민자인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데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아칸소주의 시골 지역으로 이주한다. 제이콥, 모니카 부부는 이민자들이 주로 하는 병아리 암수 감별 일을 한다.

제이콥은 좀 더 큰 규모의 일로 돈을 벌고 싶은 야망이 있다. 반면 모니카는 심장이 약한 아들이 걱정돼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한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아직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앤과 데이빗은 여느 할머니 같지 않은 순자가 영 미덥지 못하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우리가 약속했던 건 이게 아니잖아


제이콥과 모니카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첫 장면부터 드러난다. 아칸소 어느 곳에 위치한 트레일러에 이들이 도착했을 때 모니카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에 이사한 것 자체가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트레일러 입구에는 계단이 없다. 제이콥은 모니카가 트레일러로 들어오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지만 거부당한다. 이 곳으로의 이사는 ‘약속했던 것’이 아니고 제이콥의 일방적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걸 표정과 손짓 몇 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그러니까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제이콥은 그런 아버지다. 자기 생각대로 일을 저지르고, 이건 전부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콤플렉스가 심하다. 스스로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가장이라는 불안감, 어떻게든 부를 축적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있다.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아들 데이빗은 수평아리를 폐기하는 이유를 묻는다. 제이콥은 "수놈은 맛이 없어. 알도 못 낳고 아무 쓸모없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남자는 쓸모, 그러니까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그러다 데이빗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니카는 이 생각에 항상 반대한다. 가족의 문제는 항상 상의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니카에게는 아들의 심장 질환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하늘이 녹색이네"와 같은 말로 회피하는 남편에게 지쳐가고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한국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모니카는 한인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지만 한인 교회가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한다. 제이콥은 다르다. 오히려 한인들을 제일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추측해 보자면 크게 한인들에게 속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에게 집중된 대비는 중반부부터 바뀐다. 순자(윤여정)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순자와 데이빗은 문화적 간극이 가장 큰 사람들이다. 순자는 고스톱을 좋아하고 손자에게 딱딱한 밤을 입으로 씹어서 주는 할머니다. 데이빗은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실상 미국인이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건강하게 해 줘


이런 대비가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무기력해질 때다. 우물 찾기에 실패한 제이콥은 수맥을 찾는 다우징 로드를 다시 할 수밖에 없다. 모니카는 현실에 지쳐갈수록 종교에 의지한다. 영화는 내내 인물들이 생각하는 방향을 충돌시킨다. 


<미나리>는 사회문화적 모순들을 충돌시키는 영화다. 인물들의 관계와 대사 속에서 일어나는 충돌들은 묘한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감정을 톡톡 건드린다. 배경음악은 그 리듬 아래 오선지처럼 깔려있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갈등을 해소하는 인물은 순자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간극은 할머니의 등장, 뇌졸중, 화재로 모두 봉합된다. 그리고 충돌을 흡수하는 인물이 데이빗이다. 부모가 각자의 방법이 옳다고 밀고 나갈 때 데이빗만 심장이 터지도록 할머니에게 뛰어가 거리를 좁히지 않는가. 


좋은 리듬은 마찰음도 예술로 만든다. 가족이 그렇다. 모두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라도 우리 가족들은 충돌한다. 하지만 모두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앞으로 갈 수 있다. 척박하고 낯선 땅일지라도 누구든 건강하게 해주는 미나리처럼.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영화

<미나리>가 이민지만을 위한 영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족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살고 있다. 하지만 같은 원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다른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면 그 원은 찢어지기 마련이다.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뛰어가는 장면은 나에게 고통이 될 수 있어도 우리는 가족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걸 말한다.


봉준호 감독은 <미나리>를 두고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누구의 가족도 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갈등과 화해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느슨한 이야기 구조는 우리의 경험을 메꿔 이해하게 만든다.


영화는 제이콥의 사업이 잘 되는지 관심이 없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남아있는 건 가족뿐인 걸 보여준다. 창고에 화재가 난 후 이야기는 중요치 않다. 가족이 함께 모여 자는 것.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그 뿐이다. 모든 갈등 구조와 위기들은 가족이 한 마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미나리>가 수많은 영화제에서 초청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 인물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두고 직접적으로 감정을 전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스스로 느낄 시간을 준다. 우리 모두가 가족과 함께 잘 살길 바라면서도 정답을 모르는 어설픈 가족 구성원이지 않은가.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게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아버지가 사 온 '커피'와 엄마가 바라던 '물'이 아들과 대화하며 물처럼 희석된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제이콥의 창고가 불타던 순간처럼 가족의 아픔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왔다는 건 슬픈 일이다. 창고가 불타기 전까지 쌓인 상처는 몰랐다는 말이니까.


가족의 마음은 평생 모를 수 있다. 어쩌면 데이빗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가족에게 달려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순자는 뱀을 보고 놀란 데이빗에게 "숨어있는 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라고 말한다. 그 뱀은 우리가 모르는 가족의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사진=영화 '미나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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