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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Jan 07. 2017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그 최악이었던 하루가 이제 끝났습니다.

여행지에서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꿈 덕분에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최악의 하루> 오프닝 내레이션 중에서>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는 우연히 일본인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의 길을 안내하게 된다. 그날 남자친구 ‘현오(권율)’와 선약이 있어 료헤이와 헤어지고 남산으로 향한다. 일일드라마에 출연 중인 현오와는 티격태격하다 화를 내고 만다. 같은 시간에 은희의 SNS를 보고 전 남자친구 ‘운철(이희준)’이 남산에 찾아온다.

처음 본 남자, 지금 만나는 남자, 전에 만났던 남자를 하루에 모두 만난다. 은희의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영화 <최악의 하루>는 <폴라로이드 작동법>, <조금만더 가까이>, <아카이브의 유령들> 등을 통해 섬세한 감정 연출을 선보인 바 있는 김종관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은 이 영화로 제3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마치 청량한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보자면, 소설 속 주인공은 은희다. 은희는 세 남자를 하루 안에 만나며 곤경에 처한다. 그 어떤 상황도 그녀가 의도한 것이 없다. 우연히 료헤이를 만났고, 드라마 촬영 중인 현오 때문에 그곳에 가야 했고, 갑자기 찾아온 운철도 그렇다. 소설가 료헤이는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 기자는 묻는다.


 작가님이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 주지 않나요?

 

끊임없이 길을 걷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 생각나게 한다. 계속 걷고 걸으며 남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파도쳐 온다. 두 영화 모두 과거를 회상한다던지,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들에게서 사건의 동기가 나타나는 일은 없다. 영화에서 다루는 물리적 시간의 양은 매우 적지만,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 그들의 인생은 훨씬 넓고 깊다.


한 여자를 다르게 보는 세 남자의 시선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가 떠오르고, 주변 상황이나 인물이 아닌 바로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하는 은희의 마음에서 같은 감독의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주인공 민정(이유영)이 생각난다. 그리고 민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듯이, <최악의 하루>의 은희도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알기 어렵다. 이 영화를 보고 '밝고 청량한 홍상수 영화'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은희 역을 맡은 한예리는 장률 감독의 영화 <춘몽>에서 세 남자의 마음을 농락하는 측은하지만 신비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최악의 하루> 한예리는 <춘몽> 한예리의 과거 같다. 최악의 하루를 겪고 나서 성숙해졌다고 해야 할까.




저는 거짓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거짓말을 만드는 소설가 료헤이부터, 은희는 세 남자를 하루 안에 만난다. 그녀가 의아하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상대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료헤이와는 어설픈 콩글리쉬와 애교 섞인 말투로 소통한다.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 현오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땐, 반말로 톡톡 쏴대며 버럭버럭 화도 낸다. 전 남자친구 운철에겐 존댓말로 희극톤의 말을 내뱉는다. 헤어스타일도 달라지며, 심지어 걸음걸이도 다르게 느껴진다.


은희는 거짓의 세계를 표현하는 연극배우다. 그녀의 어떤 말투와 행동이 진짜인 걸까.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있긴 한 걸까. 그녀는 료헤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 표정이다. '거짓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과 소통할 때, '거짓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일종의 안정감 같은 것이 은희에게는 있어 보인다.


요즘 살고 있는 게 연극이에요.
근데 연극이라는 게 할 때는
진짜예요.


잔인하다는 기자의 말을 들은 료헤이는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위기에 빠졌던 은희를 꺼내 주고, 위로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오전에 만났던 은희를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에 다시 만난다. 은희는 료헤이에게 일본말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료헤이는 당나라 때 여동빈이란 신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를 읊는다. 은희는 무용으로 답한다. 외국어와 무용을 통한 감정의 소통이랄까. 감독은 은희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눈이 내리는 장면을 선물다. 일 년의 끝에 있는 겨울처럼 그 최악이었던 하루는 이제 끝났다고. 료헤이는 하루의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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