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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Jul 19. 2017

영화 <그 후 the day after>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위에서 춤추는 수밖에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 한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물론 그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은 그가 저지른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의 영화를 즐기는 관객까지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과하다.

영화 전문 매체 ‘씨네 21’ 주성철 편집장은 지난해 이와 관련된 언급을 했다. 주 편집장은 “영화 ‘변호인’을 좋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고, 영화 ‘귀향’을 좋아하지 않으면 매국노라는 식의 공격”이 홍상수 감독과 영화를 즐긴 사람들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말에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 ‘그 후’를 맛보고 뜯고 즐겨보려는 관객들이 불륜을 옹호한다고 매도당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상수 영화는 원래 대중적 인기가 없다.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영화가 있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영화가 있다. 근친상간을 다룬 ‘올드보이’와 여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아가씨’를 만든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망치라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바늘이다. 일상에서 흔히 스쳐가는 감정을 아주 예민하게 건드린다. 망치로 맞으면 머리든 팔이든 다리든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겠지만 바늘로 찔린 부위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내 허벅지 어딘가’, ‘내 손 주변’ 등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을 홍상수 감독은 영화로 섬세하게 찌른다.


가장 친절한 홍상수 영화


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영화 ‘그 후’는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친절하다. 현재와 과거를 반복하지만 특별한 설명 없이도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문제가 없다. 복잡한 시제 설정에도 이해가 가능한 것은 삶 속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결과다. 잊고 싶은 기억과 간직하고 싶은 추억은 같은 공간에 혼탁하게 뒤섞인다. “혼란을 벗어나고 싶지만 끝낼 능력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작은 것과 춤추고 싶다”는 감독의 말처럼 ‘그냥 사는 게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영화 ‘그 후’ 속 봉완(권해효)은 자신의 출판사 직원 창숙(김새벽)과 바람을 폈다. 현재 창숙은 출판사를 떠나고 없다. 새 직원 아름(김민희)이첫 출근했다. 봉완의 아내(조윤희)는 출판사 사무실에 찾아와 아름의 빰을 때린다. 자신의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로 오해한 것이다. 이 복잡한 사무실을 아름은 떠나려 한다.
소화되지 않은 과거일지라도
실체적 힘으로 존재한다


이 사건은 봉완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일어난 시점은 과거지만 그게 지금에 영향을 끼친다. 봉완은 직원과 사랑을 했고, 편지라는 증거를 남겼다. “다른 여자 생겼지?”라는 아내의 질문에 묵묵부답했다. 그런데 봉완은 큰소리친다. 눈은 아내를 바라보고 손가락은 빰을 맞은 여자를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아니라니까”라고. 바람피운 것을 나무라는 부인에게 무고한 사람의 뺨을 때렸다고 되려 화내는 것이다. 이 부분을 홍상수 감독은 "소화되지 않은 과거"라고 표현했다. 과거에 사건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계속 머릿속에 그 과거가 남아있다면 현재 우리의 의식과 감정에 "실체적 힘으로 존재한다"라고 감독은 생각했다.

홍상수의 18번째 장편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는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분리하는 민정(이유영)이 등장한다. 영수(김주혁)는 민정이 자신 몰래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한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영수가 민정은 밉다. 다툰 후 오랜만에 영수를 만난 민정은 “저를 아세요?”라고 묻는다. 민정은 이 대사로 경계선을 긋는다. 다투기 전과 후를 가로 짓는 이 질문으로 민정은 관계가 아닌 존재만으로 사랑받기를 바란다.


봉완은 자신의 상황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민정처럼 대처하지 않는다. 그는 뻔뻔하게 과거와 현재에 가장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이다. 자신의 과거 언행을 부정하지 않는다. 봉완은 곤란한 상황으로 뒤덮인 출판사 사무실을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영수(김주혁)과 민정(이유영)
우리는 '시간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다.


봉완은 그동안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과도 다르다. 관계 혹은 현실에서 자유로움을 갈구했던 이전 인물들과 달리 영화 ‘그 후’의 봉완은 ‘시간’에 대해 속박받지 않으려 한다. 감독은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성적 검증이 필요하지만, 믿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도 있지 않은가. 이 충돌하는 생각 사이에 믿음에 대해 말하는 아름과 달리 봉완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아름이 믿는 것을 봉완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바늘이다. 그것도 매우 얇다. 그래서 가끔 홍상수의 세상의 시간은 느리게 가는 것 같다. 스쳐가는 감정까지 섬세하게 들여다보니까. 시간에 대해 자유로운 봉완처럼, 감독은 인생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여기서 온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불안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달리던 우리에게 잠시 멈추거나 느리게 걷기를 권한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라는 믿음'에 익숙해진 우리는 사실 '돌아보기'와 '천천히 걷기'에 약하다. 시간을 쪼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세밀히 나누어볼 때 행복해지는 것을 홍상수 감독은 알았던 걸까. 칸 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익숙함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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