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슬 Mar 25. 2018

14. 원기옥

함피 가는 버스

여권, 신용카드 두 장과 민증이 담긴 지갑, 아이폰 충전 케이블과 보조배터리, 향수, 200불을 환전한 돈, 이어폰, 이제껏 찍은 사진과 영상이 담긴 카메라가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잃어버렸다. 내 손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여기에서 20시간 거리인 곳, 나시크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도를 오래 알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도시 이름이다. 나는 당연히 그 도시로 가는 버스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함피로 떠나려는 버스를 세우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권을 잃어버린 이 불법체류자는 쓸데없는 옷가지들과 책으로 가득 찬 남은 가방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가진 쓸모 있는 거라고는 배터리가 52% 남은 아이폰과 100달러짜리 한 장뿐이었다. 지갑도 휴대폰 충전기도 없이.

문제가 된 것은 삼십 분 전 일이었다. 함피, 함피. 엊그제 예약한 함피행 버스 티켓을 들고 정류장을 찾아온 우리는 함피를 되뇌며 버스 도착 시간인 저녁 일곱 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둑해질 즈음, 티켓에 쓰여있는 것과 같은 이름을 한 버스가 우리 앞에 다가섰다. 우리는 당연히 그 버스가 우리 버스라 생각했다. 그런데 들어가 앉은 뒤 몇 분 지났을까, 일행이 앉은자리에 누군가 와서는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표를 보여달라고 하고 우리 것도 꺼내 서로 비교했고, 둘 다 같은 좌석번호를 가진 티켓임을 알게 되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그때 우리가 탄 버스가 함피가 아닌 나시크로 가는 버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멘붕이 온 우리는 서둘러 짐을 들고 내렸다. 버스가 떠나고 다시 고요해진 정류장.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황당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다가, 웃었다. 15분 뒤 다른 버스가 왔다. 함피 가는 버스였다. 돌다리도 두들기자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며 기사에게 함피로 가느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자리를 찾아 앉았다. 슬리퍼칸. 짐을 하나둘씩 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버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흘러나왔다. 서서히 땀이 마르자 긴장이 수그러들고 다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2시간 뒤에 도착할 함피를 상상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때 그 가방 생각이 났다.

있어야 할 검은색 가방이 없었다. 소중한 물건을 따로 모아놓는 가방. 웬만해선 숙소에다가도 잘 놓지 않고 들고 다니는 가방이었다. 그게 없었다. 혹시나 일행의 자리를 확인했는데도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잘못 타서 급하게 내린 나시크행 버스에 놔두고 나온 것이었다.

5년 전 페루, 리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30시간짜리 버스 안에서 장염으로 고생하던 날. 정신을 쏙 빼놓은 상황에서 택시로 갈아탔고, 조금 있다가 중요한 물건이 담긴 가방을 놓고 내린 일이었다. 숙소에 체크인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숙소 주인과 함께 길거리로 나와 발만 동동거렸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그때 택시기사 모습을 한 천사가 다시 우리에게로 와서 가방을 돌려준 일이 있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잠깐이나마 이 상황을 직면하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외딴곳 땅 위에서는 이런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버스 앞으로 걸어가 아직 출발하지 않은 버스 기사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렸다. 이대로 함피를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여행을 포기하는 곳은 여기여야 한다는 생각에 가방을 메고 혼자 내렸다. 버스에 내려서 보니 그 티켓에 쓰여있는 것과 동일한 이름을 한 버스가 다섯 대는 있었다. 함정들. 버스 앞에 행선지도 제대로 써 놓지 않았잖아. 짜증이 났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게 규칙이라고 되어있는 건 또 아니니까.

정류장에 상주해 있는 듯한 버스회사 직원이 길에 있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1) 나시크 가는 버스를 영화처럼 택시로 따라잡는 방법, (2) 헤드오피스가 이 근처에 있으니 버스가 나시크까지 갔다가 가방이 분실물로 등록되어 돌아오면 찾아가는 방법, (3) 배터리가 죽기 전에 아이폰으로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 한국 지인들 몰래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 등 몇 가지 옵션이 섰다. 내가 지니고 있던 플라스틱 쪼가리와 손바닥만 한 종이 몇 장의 유무가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 참담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고 버스 직원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이유를 대지 않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무언가 결정하고 실행하려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데. 초조했다.

그 버스회사 직원은 동료들과 모여 회의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5분, 10분 지날수록 모여 이야기하는 직원이 늘었다. 어느새 대 여섯 명. 둘러싼 그 들 사이를 보니 검은색 카메라가 하나 보였다. 내 거랑 똑같은 거네. 아, 카메라도 그 가방에 있었지. 내 카메라는 잘 있을까.


내 카메라는 잘 있었다. 그들이 다루던 물건을 자세히 보니 그게 내 가방이었던 거다. 가방에서 내 물건을 꺼내어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가방이 여기에 있는 거지?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서 옵션을 (3)부터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천사가 세 명이었다. 첫 번째 천사 역할은 나시크행 버스 기사였다. 서둘러 내린 '중국인 3명(우리를 지칭)'을 보내고 기사는 버스를 출발시켰다. 버스 스탭은 표를 검사하고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10킬로미터 즈음 지났을 무렵 내가 잠깐 앉아있던 18번 자리에 주인 없는 검정 가방이 있음을 발견했다. 스탭은 기사에게 이를 알렸고, 기사는 헤드오피스에 전화를 걸어 사태를 전했던 거다. 곧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 천사는 그 전화를 받은 헤드오피스 직원이다. 전화를 끊은 그는 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첫 번째 천사를 만나러 버스가 있는 곳으로 쏘아 달렸고 버스는 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방을 전달받아 다시 내가 서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천사로부터 가방을 전달받았다. 시간을 보니 버스가 떠난 지 삼십 분이 조금 넘었다. 이때 갑자기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났다. 버스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가슴에 가방을 품은 나를 이끌며 오토바이 택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한 손에 수화기를 들고 내가 잠깐 타고 내렸던 함피행 버스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운전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버스는 정말 다음 손님을 받는 곳에 정차했다. 그리고 천사는 길거리에 있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에게 내가 배달될 도착지, 그러니까 버스가 정차한 위치를 알렸다.

이 모든 게 가방을 잃어버린 삼십 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쩌면 가방을 잃어버린 순간 이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황이 펼쳐진지도 모른다. 마치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외친 드래곤볼 손오공의 "모두의 힘을 모아줘!" 한 마디에 모여진 원기옥의 거대한 힘처럼.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동분서주한 인도 사람들이 보여준 신기할 정도의 호의와 노력이 그 가방을 다시 내 앞으로 돌려놓았다. 오토바이 택시에 올라타고 오른손을 뻗어 마지막 천사에게 감사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두 손을 꺼내 내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랑거렸다.

오토바이는 곧 버스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의 덤벙거림에 반성하고, 인도인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갚아나갈 일이다.

다시 버스를 탔고, 나를 기다리던 버스 기사와 마주했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숨 막히는 한 시간이었다.

이전 14화 13. 아람볼의 노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