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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 Mar 25. 2018

13. 아람볼의 노인

고아

마지막 일몰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일 그랬던 것처럼 산타나 레스토랑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해는 유난히 빨갛고 컸다. 한국에서는 지는 해를 이렇게 애써 매일 챙겨보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하루의 일과가 되고 있구나.


매일의 일몰과 아침바다를 구경하러 나올 때마다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다. 더 정확히는 할아버지와 그가 데리고 나오는 개 한 마리. 할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것처럼 두 손으로 노끈을 강하게 움켜쥐고 개를 끌어와 모래바닥에 앉힌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같이 보자는 듯 수평선을 먼저 응시하곤 했다. 그의 개도 곧 그의 눈을 따라 바다 끝을 쳐다보았다. 첫눈에도 인상적이었던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나타나며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둘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작고, 개는 커서 둘이 앉아 있으면 비슷한 덩치의 모습인 데다 특히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볼 때면 서로 교감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표정까지 닮았다. 같이 살면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그게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얘기는 아닌가 보다.

나는 그 할아버지가 왜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이 해변에 나오는지,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 밤이 그걸 물어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홀짝이던 맥주를 비우고 할아버지 옆으로 걸어가 물었다. "옆에 앉아도 되나요?" 할아버지와 그의 개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 다 말이 없었다. 거듭 물어보았고, 할아버지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No English."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개였다.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들을 수 있는 대답이 없다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포기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일단 대충 철판을 깔자는 심정으로 이어졌다. 최대한 미소로 인사하며 옆에 앉았다. 강아지를 보니 목에 노끈으로 인한 곪은 상처가 보였고 그곳에는 더 이상 털이 나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도망치고 싶지는 않을까. 끈을 꽉 쥔 할아버지의 두 손을 보니 도망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마치 잘못된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지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무엇도 속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안타까워졌다.



"왜 매일 여기에 오세요?"
"...."
"Why, You, Here, Everyday?"
"No English."

이렇게 나는 그와의 '말의 대화'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둘이 닮았다는 걸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카메라를 꺼내며 손으로 가리켜 괜찮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랑 흔들며 응답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보여주며 그렇지 않냐고 마음으로 물었다. 그는 그런 것 같다고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잊고 한 참 사진으로 대화를 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쉬워 입술로 꺼낸 몇 마디를 그는 마침내 이해하고 대답해주었다.

"You, Here, Tomorrow?"
"Yes."

그의 대답은 강하고 단호했다.
할아버지. 제가 못 오는데요. 물론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저 마지막으로 지는 해를 같이 바라봐주는 게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대답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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