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페이스북을 켜고 예전 사진을 한 장 보고 있다. 이 사진은 4년 전 바라나시 쿠미코 게스트하우스에서 '우리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찍었다. 카오리짱, 시노상, 주미 그리고 나. 도미토리에 일주일 함께 머문 동지들이다. 이때 바라나시에서 쌓은 추억이 적지 않다. 추억뿐만 아니라 아쉬움도 많이 쌓였었다. 몬순으로 비에 잠긴 가트때문에 바라나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렇게 쌓인 마음 덩어리가 인도를 다시 선택하는데 가장 큰 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라나시가 인도 여행의 이유라고 말할 순 없지만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열린 가트를 보는 것, 지난 추억의 장소를 다시 밟는 것.
그 추억의 장소에 발을 디디고 서서 하는 생각은, 뜻밖에도 그리움의 해갈 보다는 추억으로만 남겨두는 게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다. 이제는 같이 추억 탑을 쌓아 올리던 그 사람들이 없다. 나에게 젬배를 가르쳐주던 마헨드라는 리시케시로 떠나 레스토랑을 열었단다. 쿠미코 게스트하우스의 할아버지는 재가 되어 갠지스강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시노상과 카오리짱, 주미도 없는 올드 쿠미코의 도미토리에 더 이상 묵을 자신이 없단 생각에 쿠미코 문 앞에서 배낭을 메고 서성거리다 옆 숙소에 체크인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습관처럼 찾아가 밥 먹고 한국 여행자들도 많이 만났던 모나리자 레스토랑도 한 번 간 적이 없다. 가끔 혼자 밥을 먹던 스파이시 바이츠만 몇 번 가보았을 뿐이다. 지난 추억의 장소를 발견하면 기쁘고 또 반가울 것 같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고 보니 그 추억의 장소들을 계속 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면 추억이라는 따뜻한 음식이 거기에 그대로 있어 손으로 다시 집어삼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추억은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시간과 장소, 사람과 나의 마음을 마살라처럼 섞어 빚은 요리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지났다면 그 맛으로 다시 만들 수 없는 거였다. 그걸 모르고 다시 손에 쥐려고 하니 그 맛이 안나 실망하거나 회피하기 급급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바라나시를 피하면서만 지냈나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사람들을 새로 알았고, 가트에 앉아서 바라보는 갠지스강에서 보낸 시간은 새로운 추억으로 마음에 쌓였으니까.
새로운 추억이 쌓일수록 잡을 수 없는 게 많아진다는 두려움에 불안해할 것 같지만 추억이 없는 것처럼 불안함도 모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또 없을 것 같다. 나는 불안하면서도 추억을 쌓는 쪽을 택하겠다. 계속 여행하고, 추억 쌓고, 불안해하고, 아련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