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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 Apr 23. 2018

27. 다즐링 가기 싫어요

무갈사라이

저녁 무렵, 앞으로 일정이 달라지는 주하 그리고 혜리와 어색한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릭샤를 잡아타고 무갈사라이 정션 역으로 향했다. 다즐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다즐링은 4년 전 인도 여행에서 여정의 마지막으로 점찍었던 도시였다. 그때 콜카타에서 밤기차를 타고 이른 아침 뉴잘페구리에 도착해 졸린 눈을 비비며 배낭을 들쳐 메고 역 입구로 나오니 지프와 버스가 모두 파업이라며 잠을 확 깨워놨던 사건이 있었다. 내 앞을 둘러싼 삐끼들이 건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구글맵만 돌려보다가 이 곳이 네팔과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도착비자를 받아 생각에도 없던 포카라로 피신했었다. 그렇게 다즐링을 포기했고 언젠가 있을 다음을 기약하며 마음속에 담아뒀다. 오늘, 그 다즐링에 가게 된 것이었다.

다즐링이 지대가 높은 터라 다소 날씨가 춥다긴 하지만 진입 도시인 뉴잘페구리까지는 그다지 춥지 않을 것 같아 쾌적한 에어컨 열차를 예약했다. 값은 좀 나가지만 편하게 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사실 오늘 나에겐 편함이 좀 필요했다. 나아지는 과정에 있긴 하지만 오늘도 장염으로 고작 한 끼만 먹었던 터라 힘도 없었고.

여섯 시가 조금 넘어 무갈사라이 역에 도착했다. 원래 기차는 여섯 시 반에 타야 하지만 한 시간 정도 연착되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에 주변을 구경하며 천천히 플랫폼을 향해 걸었다. 에어컨 칸 티켓 소지자만 들어갈 수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서 책을 보다, 인터넷을 하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계속 보는데 기차가 점점 연착이 되더니 그 시간이 다섯 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인도 기차가 이런 식이 될 수 있다는 건 글을 통해 알았지만 실제로 겪는 건 처음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스마트폰을 보니 지금 시각은 밤 열 두시. 기다린 시간이 일곱 시간이 된 것이었다. 너무 잠이 와서 다즐링이고 뭐고 포기하고 바라나시로 돌아가서 타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단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망할 놈의 다즐링은 4년 전부터 왜 이렇게 나를 거부하는가.

속상한 마음을 음악의 힘으로 이겨낼까 하고 새로 나온 밴드 혁오 앨범을 플레이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기차 상태를 확인하니 전 역을 출발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접했다. 이제 곧 오는구나. 자격증 시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것처럼 페이지를 몇 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했다.

시간이 한 시간 즈음 또 지났다. 새로고침도 지쳐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한 번씩 정도로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차가 무갈사라이역을 떠났다는 메시지가 떴기 때문이다. 열차가 와야 하는 2번 플랫폼에는 어떤 열차도 오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인포메이션 오피스 같은 곳이 있어 티켓을 보여주며 물었다.


"확인해볼게. (잠시 후) 네 열차 떠났는데"
"왜? 그거 무슨 플랫폼이었는데요?"
"플랫폼 3."

젠장. 열차는 상황에 따라 갑자기 플랫폼이 바뀌기도 한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여행정보인데 배도 아프고 잠도 오는 상황이라 잠깐 잊었나 보다. 다즐링에 갈 수 없다고 선고받은 자리에 그대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몸을 뒤로 돌리니 눈 앞에는 복도에 누워 자는 거지와 승객들이 보인다. 새벽 2시. 이제 나도 저들과 함께해야 하는 홈리스가 된 거다. 속상했지만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거였다.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펜으로 손목에 쓴 다즐링이라는 글씨를 지우려고 했는데, 손으로 문질러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휴대폰 음악을 끄고 이어폰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는 정말 다즐링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나는 다즐링이랑 안 맞는구나. 그런데 안 간대도 오늘 잠을 해결할 곳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바라나시로 돌아가는 길도 수십 킬로는 되어 위험한 새벽길이 걱정되었다. 도대체 결정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 함피 가는 버스에 지갑을 놓고 내렸던 이후로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대로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머리가 더 안 돌아갈 것 같아서 일어나 발걸음을 역 바깥으로 옮겼다.

역 바깥은 까맸다. 무서웠다. 저기는 내가 있을 곳이 없어 보였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 할 수 있는 게 없어 다시 역 안으로 들어왔다. 티켓 오피스가 보이길래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생각을 거치지 않은 질문 하나를 역무원에게 던졌다.


"뉴잘페구리 가는 기차 언제 와요?"
"한 시간 뒤"

한 시간 뒤? 한 시간 뒤! 지금 시간은 두 시니까 세 시에 기차를 탈 수 있는 거였다. 그 기차도 마침 일곱 시간이 연착되어 내가 탈 수 있는 타이밍에 맞춰 오는 신세가 되었던 거다. 잘됐지만 궁금한 건 내가 왜 티켓 오피스에 그런 질문을 꺼냈나이다. 내 머릿속에는 그런 걸 물어볼 아이디어가 없었는데, 몸이 그냥 그리로 걸어가 입이 그런 질문을 꺼냈다. 신기했다.


"에어컨 칸으로 티켓 하나 주세요."
"없어요"
"그래요? 그럼 슬리퍼 칸으로 주세요"
"없어요"
"그럼요?"
"입석."

그렇게 200루피를 내고 제너럴 티켓을 손에 얻었다. 앉을자리 없는 입석 티켓. 14시간 이동이라면 새벽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걸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다즐링 가기 싫어요. 서울 집에 가고 싶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 일단 플랫폼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기차마저 또 연착이 되어 4시에 도착 예정이라는 안내 문구가 보였다. 이제는 잠도 오지 않는다. 자리 없이 14시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고민만 계속될 뿐. 그러다가 친구가 예전에 제너럴 티켓을 사고 티티(역 내 티켓을 관리하는 역무원)한테 웃돈을 줘 슬리퍼 티켓으로 바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거다. 열차가 오면 에어컨 칸으로 먼저 진입해 티티를 만나서 티켓을 바꾸는 거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지만 혹시나 몸이 더 안 좋아질까 걱정되었다. 이윽고 네 시가 되었고 열차가 플랫폼에 진입했다. 서서히 멈추는 열차에서 에어컨 칸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검은 양복을 입은 티티가 바로 앞에 있었다. 우습게도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 티티를 만나기 전까지 놓친 운이 몇 가지인지 셀 수 없을 정도인데도.

 
"빈자리가 없어. 일단 슬리퍼 칸으로 건너가서 기다려. 빈자리 있으면 알려줄게."

늦은 밤과 새벽의 경계에 있는 슬리퍼칸은 어둡고 퀴퀴했다. 설국열차 꼬리칸 모습이 떠올랐다. 복도에는 입석 티켓을 산 것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복도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구석 의자 남은 공간에 엉덩이 한쪽을 걸터앉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열네 시간을 갈 수 있는 거구나. 아니,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은 거구나. 내 앞에 보이는 저 사람처럼 나도 빈 구석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반 즈음 걸쳤다. 그런데 십 분 즈음 지났을까 너무 졸려 그렇게 버티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 에어컨 칸을 끊어 놓았었는데. 현실은 자리가 없어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바닥에 웅크려 밤을 새울 상황에 처한 지경이 되었다. 이 상태로 가만있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잠이 오려고 할 때마다 꼭 지나가는 사람이 생겨 그들이 지나가도록 몸을 더 웅크리고 비켜줘야 했다. 더럽고 후덥지근한 곳에서 잠 못 자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또 누가 지나가는지 나를 툭툭 쳤다. 짜증 나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티티 천사였다.  


"에어컨 칸이 좋아 슬리퍼칸이 좋아."

"슬리퍼요. 어퍼 사이드로."

 

땀에 젖은 몸이 슬리퍼칸에 이미 적응되어 딱히 에어컨 칸에 가고 싶은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티티는 즉석에서 티켓을 펜으로 써서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렇게 잠을 잘 수 있는 쿠폰을 손에 쥐고 내 자리로 달려갔다.

두 칸 정도를 더 지나가니 비어있는 한 자리가 보였다. 드디어 잘 수 있게 된 거였다. 시간을 보니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는 뉴잘패구리고 다즐링이고 이 기차가 나를 운반하는 곳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잠을 잘 수 있구나. 어쩌면 열 시간이 넘게 잠을 잘 수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큰 가방을 자리 위로 옮기고 작은 가방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웅크려 새우처럼 몸을 뉘었다. 길고 맛있는 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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