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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Jan 21. 2020

지독한 오후

지독한 오후였다.


단골가게에서 먹는 달밧, 매일  걷는 골목길, 길거리 먼지와 소음,  자전거 릭샤, 낯선 람들과의 잡담. 


행자의  평범한 루였는데, 갑자기   당연했던 일상이

참을 수 없었다. 카트만두 도시가 지겨웠다. 


 호텔방에 두 간째  누웠다. 일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걷고, 사진 찍고, 박물관도 가고, 사람들과 어울려 봤다. 김없이 내일은  또 왔다. 지하실 바닥에 뚫린 큰 구멍처럼, 24시간은  메꿔도 끝이  없었다.


번개 같은 충동이 일었다. 가방을 뒤졌다.  수확물은 볼 펜 한 자루, 요가 팜플렛. 침대에 엎드려  요가 동작  뒷면에 그리기 시작했다. 저녁에  완성된 한 남자를 가만 보았다. 볼펜을 쥔 나의 오른손이 타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몸을 빌어 입은 것처럼. 어색한 건 느닷없이 나타난 야채장수 사내보다 그림을 그리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과는 담을 쌌다. 미술시간에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고, 가끔 어울리지 않는 색깔을  칠했다는 선생님의 핀잔뿐. 수업시간 내에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  매번 쩔쩔맸다. 미술 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미술부에 뽑혔다. 나는 미술부 친구들을 동경했다. 어떤 점이 부러웠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내게는 결핍됐지만,  미술부원들은 태어날 때 선물받은  재능이었는지, 아니면 미술에 대한 열망이었는지. 우리가 알게 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후로는  친구들이  보통  연습장  구석에 낙서처럼 그리는 그림도  따라 해 본 적이 없다. 지루한 오후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돼서 그림을 그려 본 건.


미술시간은 나의 기분, 취향과는 상관없는 주제가 정해져 있었다.  한 달 내내 카트만두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보았다. 특히  이상하게 멈춰보면 나는  늘 그림 가게 앞에 있었다. 카트만두의 여행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특별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 그 따분하고 무료한 날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바빠서 밀렸던  생활냄새가 가득한 방을 대청소 하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  나갈 약속도 없고, 보고 싶은 영화도 떠오르지 않고, 특별히 책임질 일도  없는  주말 오후. 방바닥에 누워  허공을 보다가 문득  옷장의 옷을 개다가 이불빨래를 하고, 그러다가 가구 위치도 바꿔버리는

날.  마음속 깊은 어둠 속에 숨었던 욕구가 나타났다. 눈에  담아 둔 수백 개의 그림에 성냥을 그은 것 처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불처럼 번졌다.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 나의 눈에 담긴 세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집과 여행지 공간의 거리만큼,  타인의 시선, 재능은 타고 태어난다는 나의 생각에서도 멀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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