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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Jan 30. 2020

당신이 보여요

하루는 여행하는 동안 스케치한 그림을  친구에게 보냈다. 답장이 도착했다.

너랑 안 어울려

좀 웃겨, 별로야, 못 그렸어  정도 대답을 예상했는데, 짐작이 완전히 빗나갔다. 잠이 확 깼다. 가끔  구들의 반응이야말로  내가 여행 중임을 실감하게 하는  지도이다. 우리가 떨어져 지낸 거리가 얼마나 쌓였는지. 서로가 알지 못하는 순간이 계속  생기고, 어느 날 알아채지 못했던  들이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 말이다.  

그래서, 주위  모두가 "달라졌어." 라고 말하는 시점이 생긴다.


여행을 하면, 어떤 사람과 사물은 가로수 같다. 버스 , 스쳐가는 창문 밖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흘러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시간은 감각이 오래도록 기억한다. 카트만두 거리의 그림 가게가 시작은 아니었다. 짧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바티칸시티의 천지창조, 피렌체, 문 닫기 직전에 들어간 우피치 미술관, 서울 대림미술관. 얼떨결에 마주한 순간이었다. 날것같은 질감이 마음에 묻었다. 나 자신도 뭐라고 설명할 길 없는 조각들이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 했다. 마치 찰흙 뭉텅이를 내 기억에 바르는 것처럼. 바로 이런 지점이 많이 생길수록, 여행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겹쳐 불쑥 얼굴모양을 내미는 대목. 의미없는 퍼즐 조각이 머리를 탁 치듯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때가  꼭 온다. 어쩌면  일생동안 알지 못할뻔한 입체적인 내 모습에, 나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준 세상에 환호했다.


나는 좋아하는 게 있다면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마다, 세상 꺼질 것 같은 한숨이

싫어서,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시작했다. 책 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지겨워  방 가득 쌓아둔 책이 물리기 전까지는 며칠이든 출근 걱정  안 하고 읽고 싶었다. 나는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점점  내 식대로 선택했다. 러다가는 그림도 그릴 엄두가 평생 나질 않을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에  웅크리고 싶지 않았다. 타인  대신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의 비밀과  모험, 감정을  꺼내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조급한 기분이  들어도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떤 가게에서 크기가 알맞고 독특한  느낌의 수첩을 찾았다. 350루피. 양쪽을 동시에 여는 꼭 미닫이 문 같았다. 왼쪽 가죽 뚜껑을 열면 속지를 살짝 덮은  뒤표지가 나타난다. 마지막엔 긴 끈을 두 바퀴 감고, 끄트머리를 끼우면 된다. 손가락 사이의 끈과 가죽 뚜껑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같고, 뭔가 비밀의 문이 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만지작거리면, 나만  알고 있는 깊은 구멍 같은 세계에 빠지는 듯했다. 매번 처음 겪는 세계. 맨 처음 이면지에 그린 야채장수, 줄 그어진 공책 한 장 찢어 그린 보따리장수. 두 명을 새로 산 일기장에 풀로 붙이고, 낱장의 기억을 주웠다. 나의 시선, 발자국, 손에 닿는 감각, 귀에 들리는 소리. 혼자만의 기록을 시작했다.


그림을 그릴 때 내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을에  관해서다. 물론 잘 그릴 수 있을 지에 대한 긴장과 의심은 쭉 함께 할 것 같다. 이 감정을 없앨 방법은 모르니, 힘껏 구석으로  밀리는 수밖에. 생초보인 내가 연필이든 볼펜이든 하나의 스케치를 완성하는 데는 적어도 몇 시간이 든다. 그럴려면 피사체에게 수백 번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러니 우선 눈맞춤을  하고 싶은 상대라한다. 오래,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나만의 사전에 그리다 라는 동사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라는 문장이다. 보따리장수를 계속 보면 내 마음에 애정이 묻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내 모습이 그림에 녹는다.


타인의 생활을 관찰하다 보면 삶이 구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바구니에 매달린 국자, 집게, 쓰레받기. 히말라야 산동네에 살아도 사람은 요리하고 먹고, 청소한 티도 안 나는 방을 빗자루로 쓴다. 저녁에는 심심하니 텔레비전도 보고 싶다. 그러니 전깃줄도 필요하다. 한참을 상대를 바라보는 일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산을 좋아하는 여행자 본인도 잠잘 곳이 필요하고 카메라 배터리도 충전해야 한다. 나의 배낭에도 덕지덕지  욕망이 담겨있다. 이때쯤엔 우리  삶이  공통점으로 연결됐다는 생각에 낯선 사람에게 선뜻 말을 붙인다. 서로 공통의 언어가 없으면, 땅바닥에 뭔가 그리기도 하고, 종이에 한자, 기호, 모양을 쓰기도 하고, 몸으로 판토마임을 한다. 당신도 나도 로봇이 아니라서. 산에서 대책 없이 배가 고프고, 밤에 예고 없이 외로워진다는 구질함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잘 붙이는 여행자가  되었다. 네팔에서는 그림으로 처음 사를 했다.

당신이 보여요.  

 

림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숨어 있다. 그게 모든 여행자가 똑같은 네팔을  여행하지만, 똑같은 그림은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세상을 담는 우리의 그릇 모양이 달라서. 사랑의 얼굴이 달라서. 그러나, 시작은 비슷하다. 사랑은 궁금증이다.


사뭇 다른 방식

아주머니 이마에 걸린 솥단지, 남자의 이마에 맨 집 짓는 재료, 일꾼의 이마에 매달린 계단에 쓰이는 돌, 아이들 이마에 달린 소 먹일 풀, 포터 이마에 걸린 트레커의 가방 뭉치.


세상 어디에든 있을 것 같은 생활의 구차함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는 모습은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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