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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Feb 09. 2023

말할 수 있는 비밀 2-(4)

시대를 노래하고, 장소를 이야기 한다.

  배경은 사건이 전개되는 환경이다. 배경은 인물과 사건에 신빙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일정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 내지 심리를 암시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독자는 ‘왜 하필이면 그런 배경을 선택했을까?’를 물음으로써 작품의 성격, 나아가서는 주제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최근들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 등은 제작비용도 많고 범위도 넓다. 한 마디로 말해 예전에는 다룰 수 없는 영역이나 내용까지도 어렵지 않게 표현해 낸다. 전 세계 어디라도 촬영이 가능하고 컴퓨터 그래픽 발전에 힘입어 심해저나 우주 공간까지 공간을 표현한다. 만약 작품을 제작할 때 공간 배경 제시에 한계가 있다면 관객의 흥미를 이끌기 어려울 것이다.



  1964년 겨울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위 작품의  배경은 1964년 겨울, 서울의 밤거리이다. 1964년이라면 우리 나라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산업화를 이뤄내서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기반을 다지던 시기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생겼다는 장점이 있다면, 소외라든지 물질만능주의, 인물 관계의 파편화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작품은 겨울을 계절적 배경으로 제시한다. 겨울은 하층민에게는 춥고도 고단한 시간이다. 거기다 공간 배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이다. 제시된 내용을 함께 모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업화된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차갑고 쓸쓸한 이야기


  다음 작품을 보면 배경이 주는 우울감이 작품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접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 손창섭, '비오는 날' 중에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은 전쟁 중 장마철 부산이라는 피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힘있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할 젊은이 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 '전쟁의 폭력성'이다. 인물의 심리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비오는 날'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비오는 날의 분위기가 주는 우울한 느낌 - 전쟁이 주는 폭력성


  시간과 공간 배경은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음 작품의 공간 배경을 설정한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는 대뜸 달려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수탉을 단매로 때려 엎었다. 닭은 푹 엎어진 채 다리 하나 꼼짝 못 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 김유정, '동백꽃' 중에서


  나는 어리숙하기도 하고 순진한 성격의 인물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 작품의 특성으로 볼 때, '나'는 '점순이'의 생각을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나'에게 호감을 표현한 '점순이'의 행동을 귀찮게만 여기고 오히려 상대와 싸우려고까지 한다. 결국 '마름'이었던 점순이네 닭을 죽이기까지 한다. 분명 점순이는 이 일을 계기로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점순이의 속마음은 내 호의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일게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일단 알았다고 말한다.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둘은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에 파묻힌다. 만약 작품의 공간 배경이 강원도 산골이 아니었고, 이 장면이 장미꽃 밭이나 서울의 종로 한 복판이었다면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까? 상상은 독자의 몫이다.


  때로는 배경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특히 공간 배경이 이러한 상징성을 잘 드러낸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 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중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서술자는 교사이지만 작품 속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시점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한 소설이다. 작품은 해방 후 낙동강 유역의 조마이섬을 배경으로 권력과 유력자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희생되고 마는 섬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마이섬은 허구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했거나 또는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절박한 장소이다. 특히 육지 안에 있는 섬으로 마을 사람들의 고립감소외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배경이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를 암시하기도 한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중에서


  작품의 주인공 '김첨지'는 모처럼만의 행운(운수좋은 날)을 경험하지만 결과적으로 행운은 인생 최대의 불운으로 반전된다. '운수 좋은 날'은 식민지 치하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끌어 가고 있는 도시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겨울 어느 날, 서울 장안이 소설의 무대이다. 가난한 인력거꾼의 힘든 하루 생활은 제시된 배경으로볼 때 '운수 없는 날'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건의 결말이 배경을 통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새침하게 흐린 폼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소설을 읽고 있다면 반드시 시간적 배경을 통해 시대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을 확인하면서 상징성 등을 파악하면 문제 풀이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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