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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Feb 06. 2023

말할 수 있는 비밀 2-(3)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건이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갈등, 또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이 동기가 되어 여러 종류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소설에서 사건의 진행 과정은 이러한 갈등의 전개, 해소 과정과 일치함으로써 그 주제를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소설은 다양한 사건들로 구성된다. 그렇다고 모든 사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의미를 고민하다 보면 글을 읽어 나가기 어렵게 된다. 사실 출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물 사이의 갈등 중심인 소설이나 인물의 심리 중심인 소설을 제시하는 게 출제하기 쉽다. 여기서 '심리'란 말은 '내적 갈등'과 같은 의미이다. 아무래도 심리 중심의 소설은 대화보다는 요약적 제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글을 읽기가 쉽지 않다.



<앞부분 줄거리>  어린 시절의 친구 은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던 ‘나’는 어느 날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던 은자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은자의 전화가 걸려 왔다. 토요일이었다. 이제 오늘 밤과 내일 밤뿐이었다. 은자도 그것을 강조하였다.

  “설마 안 올 작정은 아니겠지? 고향 친구 한번 만나 보려니까 되게 힘드네. 야, 작가 선생이 밤무대 가수 신세인 옛 친구 만나려니까 체면이 안 서데? 그러지 마라. 네 보기엔 한심할지 몰라도 오늘의 미나 박이 되기까지 참 숱하게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할 만도 하였다. 고상한 말만 골라서 신문에 내고 이렇게 해야 할 것 아니냐, 저렇게 되면 곤란하다, 라고 말하는 게 능사인 작가에게 밤무대 가수 친구가 웬 말이냐고 볼멘소리를 해 볼 만도 하였다. 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박은자에서 미나 박이 되기까지 그 애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진 모양이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부천으로 옮겨 와 살게 되면서 나는 그런 삶들의 윤기 없는 목소리를 많이 듣고 있었다. 딱히 부천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부천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었다. 창가에 붙어 앉아 귀를 모으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넘어져 상처 입은 원미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는 실패의 되풀이 속에서도 그들은 정상을 향해 열심히 고개를 넘고 있었다. 정상의 면적은 좁디 좁아서 아무나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도 그들에게는 단지 속임수로밖에 납득되지 않았다. 설령 있는 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리막길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수긍하지 않았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 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 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혹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였다.

                                                           … <중략> …

  일 년에 한 번씩 타인의 낯선 얼굴을 확인하러 고향 동네에 가는 일은 쓸쓸함뿐이었다. 이제는 그 쓸쓸함조차도 내 것으로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누구라 해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고향은 지나간 시간 속에 있을 뿐이니까. 누구는 동구 밖의 느티나무로, 갯마을의 짠 냄새로, 동네를 끼고 흐르는 긴 강으로 고향을 확인하며 산다고 했다. 내게 남은 마지막 표지판은 은자인 셈이었다. 보이는 것들은, 큰오빠까지도 다 변하였지만 상상 속의 은자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은자만 떠올리면 옛 기억들이, 내게 남은 고향의 모든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곤 하였다. 허물어지지 않은 큰오빠의 모습도 그 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새부천 클럽에 가서 은자를 만나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떤 표지판에 기대어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은자의 지금 모습이 어떤지 나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설령 클럽으로 찾아간다 하여도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은자는 상고머리에, 때 낀 목덜미를 물들인 박 씨의 억센 손자국, 그리고 터진 겨드랑이 사이로 내보이던 낡은 내복의 계집아이로 붙박여 있었다. 서른도 훨씬 넘은 중년 여인의 그 애를 어떻게 그려 낼 수 있는가. 수십 년 간 가슴에 품어 온 고향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만나 버린 뒤에는 내게 위안을 주었던 유년의 소설도, 소설 속의 한 시대도 스러지고야 말리라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현실로 나타난 은자를 외면할 수 있을는지 그것만큼은 풀 수 없는 숙제로 남겨 둔 채 토요일 밤을 나는 원미동 내 집에서 보내고 말았다.

  일요일 낮 동안 나는 전화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제 은자는 가시 돋친 음성으로 나의 무심함을 탓할 것이었다. 그녀의 질책을 나는 고스란히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나는 그 애가 던져 올 말들을 하나하나 상상해 보면서 전화를 기다렸다. 오전에는 그러나 한 번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

                                                                                                        - 양귀자, '한계령' 중에서



  작품은 '나'와 친구 '은자'의 통화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나'의 독백적 진술을 통해 심리를 잘 전달하고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특성 그대로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은자'를 만나러 가길 꺼려하고 있을까? 답은 바로 '나'의 고백 속에 있다.

내가 새부천 클럽에 가서 은자를 만나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떤 표지판에 기대어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은자'는 과거와 다른 현재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는 '은자'를 통해 옛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은자'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되면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남은 고향의 옛기억을 모두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요약적 제시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인물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탁월하다.


다음 작품도 인물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난다.



  그렇게…… 그렇게도 배가 고프디야.

  그 넓은 운동장을 다 걸어 나올 때까지 불현듯 어머니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꼭 그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를 향해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넋두리에 더 가까웠다. 교문을 나선 어머니는 집으로 가는 길을 제쳐 두고 웬일인지 곧장 다릿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드는 것이었다. 저만치 구호소 식당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까닭 모를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별안간 무서운 힘으로 잡아끌었다.

  가자. 아무리 없어서 못 먹고 못 입고 살더래도 나는 절대로 내 새끼를 거지나 도둑놈으로 키울 수는 없응께. 시상에…… 시상에, 돌아가신 느그 아버지가 이런 꼴을 보시면 뭣이라고 그러시끄나이.

  어머니의 음성은 돌연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끝내 그는 와앙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어코 구호소 식당 안의 때 묻은 널빤지 의자 위에 그를 끌어다가 앉혀 놓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손바닥에 받쳐 들고 온 것은 한 그릇의 국수였다. 긴 대나무 젓가락이 찔려져 있는 그것을 어머니는 그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먹어라이. 어서 먹어 보란 말다이…….

  어머니의 음성에는 어느새 아까의 냉랭함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는 몇 번 망설이다가는 젓가락을 뽑아 들고 무 조각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는 그 구호용 가락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던 그는 그만 젓가락을 딸각 놓아 버리고 말았다. 마주 앉아서 그때까지 그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을 어머니의 눈에는 소리도 없이 눈물이 그득히 괴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탁자 밑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어머니의 낡은 먹고무신을 내려다보며 그는 갑자기 목구멍이 뻐근해져옴을 느껴야 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그 빈민 구호소 식당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기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국수는 그에게 여전히 싫어하는 음식으로 남아 있었다.

                                                                                                   - 임철우, '눈이 오면' 중에서



  작품 밖의 서술자가 이야기를 서술해 나가고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작품 속 인물인 ‘그’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내적 독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건을 직접 전달하는 서술자는 아니지만 서술자에 의해 전달되는 사건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인물을 초점 화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건을 전달하고 있는데 이때 ‘그’를 초점 화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든든한 안식처였다. 어린 시절 '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어머니'는 혼을 내는 대신 구호소 식당의 국수를 먹인다. '그'는 어머니의 낡은 고무신과 눈에 괴어오르는 눈물을 보며 아픔을 느끼고 있다. 제시된 부분은 얼핏보면 '어머니'와 '그'의 갈등인 중심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심리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가난을 핑계로 이런 저런 행동을 정당화하던 '그'에게 '어머니'의 눈물은 참기 어려운 아픔이었던 것이다. 그의 심리가 서술자의 직접 제시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다음은 인물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누가 돈 쓰는 것을 아랑곳하랬나? 누가 저더러 돈을 쓰라니 걱정인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어떻게 쓰든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 뜸하여지며 부친이 쌈지를 풀어서 담배를 담는 동안에 상훈이는 나직이 말을 꺼냈다.

  “……돈 쓰신다고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공연한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첫째 잘못이란 말씀입니다.”

  “무에 어째 공연한 일이란 말이냐?”

  부친의 어기는 좀 낮추어졌다.

  “대동보소만 하더라도 족보 한 질에 오십 원씩으로 매었다 하니 그 오십 원씩을 꼭꼭 수봉하면 무엇 하자고 삼사천 원이 가외로 들겠습니까?”

  “삼사천 원은 누가 삼사천 원 썼다던?”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삼사천 원이란 돈이 족보 박이는 데에 직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 조씨로 무후(無後)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에 끼려 한즉 군식구가 늘면 양반에 진국이 묽어질까 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들을 씻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하기 때문에 난봉자식이 난봉 피운 돈 액수를 줄이듯이 이 영감도 실상은 한 천 원 썼다고 하는 것이다. 중간의 협잡배는 이런 약점을 노리고 우려 쓰는 것이지만 이 영감으로서 성한 돈 가지고 이런 병신 구실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야 얼마를 쓰셨던지요. 그런 돈은 좀 유리하게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재하자 유구무언(在下者 有口無言)’의 시대는 지났다 하더라도 노친 앞이라 말은 공손했으나 속은 달았다.

  “어떻게 유리하게 쓰란 말이냐? 너같이 오륙천 원씩 학교에 디밀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자식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게 쓰는 방법이냐?”

  아까부터 상훈이의 말이 화롯가에 앉아서 폭발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서 위태위태하더라니 겨우 간정되려던 영감의 감정에 또 불을 붙여 놓고 말았다.

                                                                                                          - 염상섭, '삼대' 중에서



  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 아들인 '조상훈'과 아버지인 '조의관(영감)'이 족보 만드는 일을 사이에 두고 언쟁을 벌이고 있다.  인물 사이의 갈등이 드러나 있다. 이런 경우 갈등의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겉으로 볼 때는 아들인 '상훈'이 합리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감(조의관)'의 말을 들어보면 '상훈'도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모습이다. 따라서 갈등의 근본 원인은 족보를 핑계삼았지만 집안의 재산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도 "영감은 아들의 말 ~ 병신 구실해 보기는 처음이다." 라는 부분에서 인물의 심리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 서술자의 시각이 아닌 '영감(조의관)'의 입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대화를 중심으로 한 인물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시험지에서 소설을 접하게 되면 일단 다른 어떤 글보다 내용이 많아서 길게 느껴진다. 이럴 때 한 번에 글을 읽고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되면 마냥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국어시험의 시간 조절 문제는 소설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 번에 읽고 풀지 못하면 시간 조절에 실패하는 것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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