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와 정시 사이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김수영은 자신의 소시민적 한계를 이런 방식으로 노래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삶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래서
김수영은 성공한 시인이다.
어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 학생이 실기 중심의 수시 모집에 집중하기 위해서 종합학원을 그만둔다고 한다.
몸이 -구체적으로는 허리가 나갔단다. - 아파서 도저히 정시 실기를 대비하기 어려우니 수시 실기에 집중하야 해서 학원을 그만둘래요.
이 말은 참으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체육 전공자에게 수시란 그야말로 실기의 끝판왕들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몸이 아픈데 수시에 집중한다는 말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지금 네 말은 수시나 정시의 문제가 아니라 공부에 대한 부담과 자신감 결여이기 때문에 도피성 발언이다.
당장은 도망가면 편하겠지만 결국 넌 또 너 자신에게 지고 말 것이다.
오히려, 운동을 쉬고 몸을 치료하면서 공부에 좀더 집중하는 게 좋겠다.
수시에 집중하려면 또 실기를 잘해야 하지만 샘 말처럼 혹시 수시에서 잘못되면 정시도 문제가 되니 나가서 과외를 받으면서 실기에 집중하려고 해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동의하셨어요.
아이 고집이 워낙 세네요. 그냥 수시로 보내면 좋을 거 같아서요.
이건 수시에 대한 모독이다. 수시에 목숨을 걸고 운동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비하이다.
그들을 지금도 한 순간 한 순간을 목숨을 걸고 대입 준비 중인데도
자신은 몸이 아파서 운동을 수시에 집중한다는 아이의 궤변에 지고,
아이가 정시에 대한 대비도 한다니 기특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다시 지는 것이다.
이 순간 갑자기 양관식이 떠오른다. 애순이와 금명이와 은명이에게 늘 그들 곁에서 든든한 무쇠 같은 울타리가 되었던 양관식은 이럴 때 뭐라 했을까?
하기 싫으면 언제든 빠구!!!
아니다 양관식의 주변인들은 하기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양관식의 그 말이 오히려 가족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하기 싫으면 빠꾸!!!
이 말을 곡해하는 것만 같다.
하다가 안 되면 빠꾸(?) 해도 된다는 말로 말이다.
이 말은 내가 늘 곁에 있으니 걱정 말고 끝까지 가 보라는 응원가이다.
이로써
난 오늘도
이렇게 또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