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못 마시는 술꾼
난 정말이지 술을 못 마신다. 죽자 하고 마시자면야 못 마실 건 없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서 술을 마실 일은 없으니 술을 못 마신다는 말이 맞을게다. 가끔은 술을 잘 마시면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가령 낯선 사람들과의 모임을 한다든지, 중요한 일을 끝낸 직후라든지, 내가 목이 터져라 현장에서 응원하던 야구팀이 이겼을 때든지, 아니면 질 때도 좋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딱 막걸리 한잔을 시원스럽게 마시고 싶다. 해가 쨍쨍 내리쬘 때라면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셔도 보고 싶다.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을 때는 잘은 모르지만 와인 잔에 와인을 담고 입술을 살짝 담그고 싶다. 그런데 도통 술을 마시지 못하지 그런 기분을 끝내 못 느끼면서 살고 있다.
대학 1학년 때는 나도 술을 잘 마시는 줄 알았다. 술 한 잔만 마시면 바로 잠들어 버리고 어느 순간 잠을 깨면 다른 친구들이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 멀쩡한 정신으로 귀가를 했으니 늘 내가 술을 제일 잘 마시는 줄 았았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잠을 드는 속도와 빈도가 자꾸 빨라지는 게 문제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웬만한 잔디밭과 학생회관의 동아리방, 로비의 의자라면 거의 빠짐없이 잠을 잤으니 말이다. 잠을 자다가 토하고 또 자면서도 깨고 나면 내가 제일 멀쩡하다고 느꼈다.
입대를 하고 나서 술에 대한 내 믿음이 깨지고 말았다. 이동막걸리로 유명한 곳에서 군 생활을 하다 보니 대민지원이라도 나갈 양이면 늘 마을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주셨다. 참 달고 맛있어야 하는데 이건 도통 쓰기만 했다. 술을 입에라도 댈 때면 선임하사 왈
야, 넌 앞으로 술 마시지 마!
동네 술을 혼자 다 마신 것 같은 얼굴로 부대 복귀하면
나만 욕먹는단 말이다.
그 후로 부대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날 저녁 나는 말뚝 근무를 서야만 했다. 술을 안 마신 유일한 병사였기 때문이었다. 격오지 부대에서 술 못 마시는 병사의 설움을 톡톡히 느꼈었다.
교사가 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회식이 잡혔다. 당시 93세였던 이사장님께서 직접 신임 교사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나이 많으신 이사장님께서 두 손으로 따라 주시던 술을 그냥 내려놓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아침에 출근을 하자마자 교장 선생님이 부르셨다.
강선생님, 몸은 좀 어때? 앞으로 술은 마시지 말지!!!
내가 숨 가빠하고 힘들어하니 모두들 회식자리에서 걱정들이었나 보다. 회식자리가 어색하게 끝난 것도 다음날 알게 되었다.
EBS 강사로 이름을 날릴 때면 저녁 무렵 출판사 근무하던 분들이 자주 찾아와 식사를 요청했다. 그땐 늘 맥주 한 잔 정도를 권해서 억지로 마셨던 기억이 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내 손에 출판 관련 계약서가 들려 있었고, 난 꼬박 1달 이상을 원고에 매달리면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요즘 들어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가끔 소주 한잔에 찌개 한 숟가락 떠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저녁에 소주를 반 병씩 마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늘 술 때문에 문제가 많았던 아버지였지만, 가끔 몸이 아프고 고단할 때면 소주 한 잔을 마시고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생전 혼자 소주를 드시던 아버지 모습이 그리워지곤 한다.
나와 아내는 절대 술을 못 마신다. 그런데 아들과 딸도 똑 닮았다. 우리 식구는 어디 가서 무얼 먹어도 술 대신 음료를 시킨다. 그리곤 술을 거나하게 마신 사람들처럼 실컷 떠든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도 많지만
술보다 가족과 실컷 떠드는 게 더 재미있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