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을 나는 백구 Apr 14. 2023

말할 수 있는 비밀 4-(1)

오답 노트 말고 정답 노트 만들기!

  문제를 풀다가 틀릴 경우 학생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공부법은 '오답노트' 만들기다. 이것은 말 그대로 내가 왜 틀린 답을 골랐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가령, 정답이 1번인데 본인이 5번을 골랐다면 5번이 왜 답이 아닌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선택지 안에서 잘못된 표현이나 내용을 찾아 정리하고 만족해 한다. 


  그런데 '오답 노트'라는 말 속에 숨겨진 잘못된 개념이 있다. '오답'은 '오답'일 뿐이다. '오답'을 잘 정리했다고 해서 '정답'을 쉽게 찾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다음에도 유사한 유형의 문제가 나온다면 당연히 '오답'을 거르는 힘은 길러졌으니 조금 전에 설명했던 선택지를 고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4개의 선택지 가운데 또다시 정답을 고르지 못하고 오답에 빠질 가능성은 오히려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는 선택지가 왜 답이 아닌지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학생이 '정답 노트'를 만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까? 가령, 앞서 설명한 내용에서 정답이 1번인데 왜 그것이 정답이 되는지를 정리했다고 하자. 그러면 유사한 문제가 나왔을 때 정답이 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매력적인 오답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은 문학, 독서, 언어와 매체, 화법과 작문을 가리지 않는 기본 원리이다. 


다음 글을 읽고 답을 고민해 보자. 


한여름 채전으로 ㉠ 가 보아라

수염을 드리운 몇 그루 옥수수에 가지, 고추, 오이, 토란, 그리고 울타리엔 덤불을 이룬 넌출 사이로 반질반질 윤기 도는 크고 작은 박이며 호박들!

이 ㉡ 지극히 범속한 것들은 제각기 타고난 바탕과 생김새로 주어서 아낌없고 받아서 아쉼 없는 황금의 햇빛 속에 일심으로 자라고 영글기에 숨소리도 들릴세라 적적히 여념 없나니

㉢ 과분하지 말라 의혹하지 말라 주어진 대로를 정성껏 충만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족할 줄을 알라 오직 여기에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에 있거니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나비가 심방 오고 풍뎅이가 찾아오고 잠자리가 왔다 가고 바람결에 스쳐 가고 그늘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햇볕이 다시 나고 …… 이같이  ㉣ 많은 손님들의 극진한 축복과 은혜 속에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의 지극히 충족한 ㉤ 빛나는 생명의 양상을 한여름 채전으로 와서 보아라

                                                                                                    - 유치환, <채전(菜田)>


문제) ㉠~㉤의 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을 반복하고 변주하여 ‘채전’에서 겪을 수 있는 경험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② ㉡을 수식어로 반복하여 ‘범속한 것들’로부터 ‘충족한’ 느낌을 받는 화자의 정서를 강조하고 있다.

③ ㉢에서 부정 명령형을 사용하여 ‘주어진 대로’ ‘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화자의 인식을 제시하고 있다.

④ ㉣에서 사물을 인격화하여 ‘극진한 축복과 은혜’와 대비되는 화자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⑤ ㉤에서 관념을 시각화하여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이 이루어진 대상에 대한 화자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은 한여름 채소밭의 생명들이 생명력을 보이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다. 문제가 요구하는 내용은 설명을 잘못하고 있는 선택지를 고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답은 ④이다. 왜냐하면 '나비, 잠자리, 풍뎅이'와 같은 '많은 손님들'이 축복과 은혜를 주는 가운데 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올바른 내용으로 선택지를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④ ㉣에서 사물을 인격화하여 ‘극진한 축복과 은혜’와 대응되는 화자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고 그것이 왜 답이 아닌지만을 생각한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내용은 결국 '맞으니까 아니지'로 귀결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험 문제를 풀고 나면 '오답 노트'를 만들지 말고 '정답 노트'를 만들라는 것이다. 틀린 문제의 정답을 나 스스로 만들어보고, 기존 선택지와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답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할 수 있는 비밀 3-(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