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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Jul 23. 2019

속고 싶어 속았겠지

-스핀오프 08: 보기보다 적게 드시네요?

소화불량에서 헤어 나오기 시작한 계기는 약이 아니었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카페라테로 입을 씻고 이야기를 나눴다. 뜻밖에 조금 길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전화 통화할 때는 좀 긴장된다. 말로만 소통하다 보면 이해보다 오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십 분쯤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끝나고 나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밥상을 보니 삼분의 이쯤 먹었다. 남은 것들은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 뒤부터 속이 편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편한 이유가 뭐지? ‘편하다’는 느낌이 낯설었다. 마시던 커피를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게 마시던 것이다. 식사 후에 마시기만 하면 위장이 멈추는 듯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식사량이 많았던 것일까?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이 그랬다. '보기보다 적게 드시네요.' 어,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보기에는 어떤데요?' 물어 보려다가 말았다.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다 표현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상대방도 그렇겠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주변 사람들의 한결같은 그 '평가' 때문에 내 식사량이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실은 거울 뒤쪽에서 나온다. 어쩌면 뒤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속고 싶어서 속은 것이겠지. 적게 먹으니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적게 자주 먹었다. 더 이상 위장약은 먹지 않았다. 거의 모든 문제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아들은 출근했고 집안은 고요했다. 외출할 때처럼 여기저기를 다 돌아보았다. 다용도실까지. 닫힌 문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도 없었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빨래통만 가득 차 있었을 뿐. 빨랫감은 대개 수건과 속옷이다. 한 달에 한 번쯤 돌린다. 수건은 오십 장쯤 있고 이제 혼자 쓴다. 언제나 충분하다. 빨래를 돌려도 그다음 날이면 곧바로 쓸 수 있으니.


다만 빨래통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청소한다. 그건 그래야 한다. 안 그러면 빨래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 대개 등산복이나 양말을 돌린 다음 통세척을 한다. 양말은 아마 백 켤레 넘게 있을 것이다. 세 식구가 함께 쓰던 것이었으니. 역시 자주 돌릴 필요는 없다. 대개는 대여섯 시간 신고 있다가 벗은 것이라 많이 더럽지도 않다.


수건 세탁을 하는 날이면 집의 건조대 모두 펼친다. 거실에도 하나. 양말도 마찬가지이고. 오늘이 그런 날이다. 빨래통에 있는 수건과 속옷을 넣고 돌렸다. 10킬로 통이 가득 찼다.


배가 고팠다. 뭘 먹을까 하다가 냉장고를 파 먹기로 했다. 밥을 씻어 안치고 서재로 갔다.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한다. 쾌속으로 지은 밥은 맛이 없다.

반찬은 뭘로 할까? 냉장고 속을 그려보았다. 땅콩조림, 쫑쫑 썰어서 들기름에 버무려놓은 열무김치, 영양부추 무침을 꺼내자. 어제 무쳐놓은 콩나물을 꺼내 육수에 넣고 한소끔만 끓여내면 콩나물국이 될 거고. 달걀프라이를 하나 갓 지은 밥 위에 올리면 충분해.


막상 밥을 차리면서 하나 더 만들었다. 어제 씻어놓은 시금치가 떠올랐던 것이다. 끓는 물에 넣었다가 곧바로 건져서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좀 넣어서 볶았다. 이금기 프리미엄 굴소스로 간을 했고. 거기에 어제 먹다 남은 소고기 갈빗살을 털어 넣었다. 접시에 담고, 그 위에 갓 지은 밥, 달걀 프라이를 올렸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차린 가정식 백반, 듣고 싶은 eBook을 찾아 들으며 먹었다. 집안은 고요했고. 책 읽는 소리가 시끄러운데도 고요한 이유가 뭘까? 딴생각하다 보니 읽어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려서 듣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텍스트의 꿈속으로 빠져들자. 잠이 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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