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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Jul 28. 2019

어떤 미소

-글쓰기에 대한 소문과 진실 / 일본제 불매운동과 언어

얼마 전에 한 일본인이 한국의 일본제 불매운동에 대해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자어인) 교육, 학교, 교실, 국어, 과학, 사회, 헌법, 민주주의, 시민, 신문, 방송(이라는 말도) 모두 일제 아닌가”*


틀린 말이다. 무엇보다 이 한자어의 원 저작권자는 일본이 아니라 유럽이다. 그들은 번역을 했을 뿐이다. 그 번역도 순수한 일제가 아니다. 중국제 한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대 한국인이 쓰는 한자어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 번역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걸어온 길은 일본화가 아니라 서구화였다. 그 언어에 담긴 아이디어가 유럽제이니 당연한 일이다.

번역어에 번역자의 생각이 조금은 스며들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미 번역되고 유포된 한자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중국도 그런 의미에서 ‘이미 일본이 번역한 용어’를 사용하여 빠르게 개혁하려 했다. 잘 되진 않았지만.


한국도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를 사용해서 서구의 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조금도 고마울 게 없다. 일본인들은 그 대가를 ‘일제강점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이, 그것도 폭력적으로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언어와 관련된 문제는 실용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미 유포되어 쓰이는 언어를 의도적으로 바꿀 방법도 없다. 언어는 문화 권력이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 권력은 그 문화를 만들어낸 국가의 힘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쓰이기 시작한 ‘일본식 한자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는 해방 뒤에도 영향력이 컸다. 한국의 지배층이 여전히 친일파였던 것도 큰 이유였을 것이다. 역사를 청산하지 않았으니 언어도 청산될 가능성이 없었다. 서구의 새로운 기술 대부분이 일본을 거쳐 들어왔으니 일본어를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가 젊은 시절만 해도 한국어 책을 만들면서 ‘모리자와 글꼴이나 샤켄 글꼴’로 조판했고, 와리스케(레이아웃)한 다음 하리코미하고 고바리를 거쳐 소부해서 일본제 인쇄기로 인쇄했다. 이제 이런 용어들 대부분 사라졌다. 출판 과정도 변했다. 그러면서 문화 권력은 영어로 넘어간 것이다.

요즘은 주로 애플사의 컴퓨터로, DTP를 사용해서 편집한다. 폰트(글꼴)는 대개 명조나 고딕을 쓴다. 물론 명조나 고딕이라는 이름 역시 일본에서 만든 것이긴 하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출판계에서 사용되는 일본어는 아주 적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고대에도 마찬가지로 언어는 문화 권력이 통제했다. 대륙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던 시절에는 한반도의 언어가 일본으로 많이 들어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예 가운데 하나가 미소(된장)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내 미소시루(된장국)를 끓여주겠어?” 그만큼 미소는 일본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미소는 고려어 ‘메주(密祖)’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가 없다. 소리는 남지 않으니까. 어쩌면 미소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만주어로는 ‘미순’이었다고 하니. 이건 짐작이 아니다.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한자사전인 ≪왜명유취초 倭名類聚抄≫에 미소가 고려장이라고 쓰여 있다.


더 오랜 기록을 보면, 기원전 7세기의 관중에 대한 책인 ≪관자≫에 융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산융족의 콩(숙)이라는 뜻이다. 그 이전에도 중국에 콩이 있었지만 그것은 가축사료용이었다. 융숙은 사람이 먹는 음식 재료였고. 산융족이 살던 지역은 콩의 기원지인 만주였는데, 훗날 고구려 지역이다.

또 6세기 전반에 쓰여진 서민을 위한 농업기술 안내서 ≪제민요술≫에 흑고려두, 황고려두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이다. 이 두 기록을 바탕으로 짐작해 보면 중국인들은 콩과 관련된 음식의 기원을 고구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중국의 간장공장 사람들은 만주 지역 콩으로 만들어야 맛있다고 한다.

 

된장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 일본의 된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한국에서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거의 모든 일본 된장 제작 방식이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맛이 다른 이유는 기후와 발효균 때문일 것이다. 맛이 다르니 다른 재료에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일본어는 고구려어와 닮은 데가 아주 많다. 특히 숫자가 그렇다. 사실 일본어는 아예 열도한(국)어라고 주장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아나타와 한국인≫이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인데, 대단히 학술적이고, 저자는 평생 언어학을 연구한 세계적인 일본인 학자이다. 양쪽의 고대어를 추적 비교, 분석하는 방식이라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최근에 유전자 비교 분석, 추적 결과도 그의 연구결과를 지지한다. 일본인의 조상인 야요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벼농사와 청동기, 철기 문화를 가지고 갔다.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정체성의 유적Ruins of Identity≫이 바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여담이지만 중요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마크 제임스 허드슨Mark James Hudson(1963~) 교수는 서구주대학西九州大学(1968년 설립)을 비롯해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인류학과 환경인문학을 강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이 무슨 단일민족이나 단일문화를 이룬 독특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문화의 근원은 한반도이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 계속 강의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받을 만하다. 그렇지 않았다. 결국 2018년에 일본을 떠나야 했는데, 이유는 <시즈호카 현 후지산 세계유산센터>에서 근무하던 중 시즈호카 현 당국에게서 '학문적인 괴로움academic harassment'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쇼비니스트이다.


문화와 언어는 흐르고 뒤섞여서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언어는 더욱더 그렇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일본제 한자어 같은 것은 없다.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가 일본제이니 쓰지 말라는 소리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후안무치하고 배은망덕하다.


개가 사람을 문다고 사람도 개를 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들이 쇼비니스트라고 우리도 쇼비니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쇼비니즘은 자멸하는 길이다.


*<구로다, 불매운동 조롱>, 서울신문, 2019년 7월 22일

**wikipedia, 富士山世界遺産センター、2教授退職しピンチ『読売新聞』朝刊2018年4月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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