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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Jul 29. 2019

데이지의 알리오 올리오

-스핀오프09

영화 <데이지>를 우연히 보았다. 숨겨져 있던 사랑이 고개를 내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킬러와 형사, 화가가 만든 삼각관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암시한다. 광장에 나와 그림을 그리던 혜영이 소낙비를 피해 건물 아래로 뛰어든다. 화판의 물감이 비를 맞아 땅바닥으로 흘러내리고, 고인 빗물에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해도'라는 글이 거꾸로 비친다. 


잠은 오지 않고 머리는 아팠다. 머리를 식혀야 했다. 이럴 때는 경쾌한 스릴러가 보고 싶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어느 정도는 범죄이고 그래서 서스펜스가 삶을 뒤흔든다. 그 극단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비극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실제 삶에서는 그 비슷한 경험도 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릴러는 에스에프나 다를 바 없다. 에스에프는 지금 현재를 부정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집이 너무 고요하기도 했다. 좀 시끌시끌한 소리가 여기저기에 스며들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스릴러를 검색했다. 웬만한 스릴러는 거의 다 보았다. 썩 내키지 않던 것들만 남았다. 코믹이라거나 로맨스가 더해졌다고 하는 것들. 어쩔 수 없이 아무 거나 찍었다. 기자의 평가가 있는 것 가운데 하나. 한국영화였지만 기자들에게서 오점을 받았다. 뻔한 이야기라는 평가가 있었고. 그래서 보자고 했다. 밤늦게, 뻔해야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다가 여러 번 울었다. 엇갈린 사랑,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아직은 이런 장면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장면에서는 통곡을 했다. 혼자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집안의 고요를 깨뜨리며.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울다가 말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우연한 이야기가 시시했다. 요즘은 달라졌다. 아내를 간호하면서 만난 수많은 우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이스북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고. <데이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앞날이 어떻게 되든No matter what the future can be changed"이라는 말이 고인 빗물에 비쳐 스치듯 지나간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밤늦게 아내의 장례식에 혼자 들러 주었던 사람이다. 시계를 보니 두어 시간 전이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무슨 일일까? 

“혹시 시간 나시면 주말에 원고 한 번 봐주시겠어요?”

“찬찬히 설명해 보셔요.”

“작가님도 잘 아는 내용이에요. 월요일까지 보내야 하는데 급하게 작업해서 그런지 판단이 서질 않아요. 원고 매수는 백 매쯤 되는데 평가만 해주셔요.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많이 드리지는 못해도 웬만큼은 챙겨 드릴게요. 내일 오전까지만 연락 주셔요. 읽어만 봐 달라는 거니까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메일로 보내 놓을게요.”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예.......” 

일단 보기나 하지 뭐.           


양치질하면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쳐들어오는 방법도 있구나. 어떤 모임에 갔다가 인사를 했고, 그 모임에서 두어 번 보았다. 이야기를 조금 나누기도 했다. 그래도 밤늦게 아내의 장례식에 다녀가지 않았다면 기억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나는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고서는 잊었다. ‘연락하라’는 이메일조차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아침을 먹으며 메일을 열어 보았다. 파일을 받아 보니 ‘독서와 관련된 기획서’였다. 기획의도와 실행 순서, 도서목록도 훌륭했다. 글도 깔끔해서 고칠 데도 거의 없어 보였다. 몇 가지 흠이 없진 않았지만. 간단하게 코멘트를 달고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한 아이디어를 두어 개 첨가했다. 


일요일 오후에 전화가 왔다. 

“작가님, 급하게 부탁드렸는데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본적으로 잘 쓴 글이어서 제가 드릴 말씀이 거의 없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괜찮으시면 서울에 강의하러 나오시는 월요일에 조금 일찍 나오셔서 저녁 드시고 가셔요. 근처에 괜찮은 이태리 식당이 있습니다.”


언젠가 얼굴 한 번 보긴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강의하러 가는 길에 저녁식사와 함께 한두 시간, 그러면 부담이 적다. 그렇지 않다면 좀 난감하다. 잘 모르는 사람과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게다가 보내온 기획서 내용만으로도 화제는 충분할 테니까. 잘된 일이다. 그러자고 했다.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스파게티 좋아하시죠?”

“예.”

“그러면 데이지에서 뵈어요. 강의하시는 곳에서 가까워요.”

조금 놀랐다. 데이지라고?      


레스토랑에는 마가렛이 많았다. 마가렛이 데이지인가? 그럴 리가. 서빙하는 분께 물어보았다. 

“저게 데이지인가요? 마가렛이 아니고요?”

“데이지입니다. 데이지가 마가렛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이미지로는 구별이 안 된다. 데이지 꽃말은 숨겨진 사랑이다. 어제 영화 보면서 알게 된 것이다. 마가렛은? 진실한 사랑이다. 하, 재미있네. 숨겨진 사랑이나 진실한 사랑이나 비극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알리오 에 올리오를 시켰다. 처음 가는 곳이면 습관처럼 선택하는 메뉴다. 얼마나 좋은 재료를 쓰는지, 그 재료를 얼마나 잘 다루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타르투포를 시켰다. 향이 강해서 열정적으로 느껴지는 스파게티다. 


물어보았더니 알리오 올리오에는 호주의 코브램 농장에서 올해 첫 수확한 올리브로 짠 것을 썼다고 한다. 뉴욕에서 열리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3년 연속 최고등급으로 인정받았고. 매운 올리브와 부드러운 올리브를 섞은 것이다. 향과 맛을 강렬했다. 혹시 한 병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의논해 보더니 포장해 놓겠다고 했다. 


주로 독서와 인문학 교육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대 이상으로 아주 지적인 사람이었다. 책도 많이 읽었고. 공감대가 컸다.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친해지고 관심이 생기면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 숫자가 아주 적다. 


“작가님이 짚어주신 몇 가지가 아주 유용했습니다. 멋진 아이디어였고요. 제가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었어요. 늘 이 프로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그걸 채워주셨어요. 자주 연락드려도 되죠?”

“조금 부담스럽군요. 돈 말입니다. 많이 보내셨더군요. 일은 부담이 안 되는데...... ”

“돈 잘 버는 회사에서 내는 컨설팅 비용이니까 그것도 부담 가지지 마셔요.”     


참 예쁜 얼굴이었다. 생각이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기 때문일까? 왜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나오면서도 그랬다. 뒷모습도 아주 아름다웠다. 패션 감각일까? 악수하고 헤어졌다. 눈빛이 다시 스쳤지만 사무적인 느낌을 넘지 않았다.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지킬 필요가 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사람의 페이스북을 좀 들여다보았다. <데이지>의 여주인공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많이 닮았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마가렛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거기에 데이지가 오버랩되었다. 데이지, 비극의 주인공이다. 숨겨진 사랑이라니, 진실한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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