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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Aug 31. 2019

판단불가 낯섦

-스핀오프 14

“아직 남았어요?”

게이샤가 어느날 전화해서 한 말이다. 조금 뜬금없었다. 뭐가 남았는지 묻느냐고 물었다. 지난번 그 콜드브루 게이샤 말이에요. 아~! 그날 한 병 받아 온 것. 나는 가격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손사래를 쳤더니 퍼뜩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저는 반값에 사니까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났을 것이다. 뜨겁고 간지러웠다. 낯설기 짝이 없는 느낌이었다. 수십 년 동안 나에게 이런 식으로 귓속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게이샤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잠깐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세상에, 콜드브류 게이샤는 지금까지 마셔본 것 가운데 최고였다. 글을 쓰면서 한 모금 입을 적실 때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게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 비싼 걸 계속 사 마셔야 하나, 아니면 그동안 마시던 것으로 돌아가야 하나, 맛을 알게 되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조금 남았어요.”

“향과 맛이 최고죠?”

“그랬어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망설여지시죠?”

게이샤는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너무 비싸요.”

“선생님도 참, 제가 사면 반값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다고 어떻게 늘 사 달라고 하겠어요?”

“못하실 건 또 뭐예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무슨 관계라고 아무 거나 막 부탁해요?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 

게이샤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어요. 책도 많이 쓰셨고 강의도 많이 하시는 유명한 분이더군요.”

“유명하긴요.......”

“게이샤가 필요하시죠? 시간 되면 오셔요. 제가 준비해둔 게 있거든요.”

마치 시간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아, 그 카페에서도 판매하나요?”

“예, 시작했어요. 일단 와 보셔요. 열 시까지는 가게에 있을 거니까요.”     



열시쯤 그 카페에 도착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게이샤가 나타났다. 

“혼자네요?”

“예, 잠깐 앉으셔요.”

게이샤는 카페 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린 다음 커피 두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가운 카페라떼였다. 콜드브루와 맛있는 우유(우유라고 다 같지 않다)를 일대이로 섞는다. 계량은 에스프레소 잔을 쓰는데, 그러면 머그 잔에 칠부쯤 찬다. 시럽을 조금, 소금은 아주 조금 넣고 백일곱 번 휘젓는다. 그런 다음 실리콘 덮개로 덮어서 냉동실에 넣어둔다. 아마 한 시간쯤? 그러면 살짝 언 상태의 맛있는 냉커피가 된다. 집에서 만들어 마시는 바로 그 맛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지난번에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커피 이야기만 두어 시간 나눴으니. 향과 맛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시면서 가게를 둘러보니 한쪽 벽에 사진이 좀 있었다. 일어나 가서 보았다. 

“사진이 좋군요. 직접 찍은 건가요?”

“예.”



내가 자리에 앉자 게이샤가 말했다. 

“선생님 저도 제대로 독서해 보고 싶어요. 인문학도 공부해 보고 싶고요.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나름대로 바빴거든요. 카페 만들어 자리 잡아야 했고, 틈틈이 사진도 찍었어요.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시작해 보려니까 막막하더군요. 정말 책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인문학은 어렵잖아요. 딱 그 시점에 선생님을 알게 되었어요. 멋진 타이밍이었죠. 물론 순전히 제 중심이지만요. 뭐, 어쨌든 한 번 부탁드려 보자, 싶었던 거죠.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니고요, 저는 콜드브루 게이샤를 드릴게요. 일주일에 한 병씩, 대신 선생님께서 제가 제대로 독서방향을 잡고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셔요.”

너무나 뜻밖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저한테 뭔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 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강의를 했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은 없어요.”

“저도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이 개인과외를 하시면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쌀 거라고도 생각했고요. 그래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선생님은 공개강의를 많이 하시니까, 그걸 녹음해 주시면 들어보는 거죠. 그리고 뵙게 되면 제가 궁금한 걸 여쭤보고, 조언을 듣고요.”

“아, 예...... 일단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제 강의 녹음을 듣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강의를 들었던 분이 녹음을 듣는 거야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말하다 말고 퍼뜩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일어났다.

“잠깐 차에 다녀올게요.”

그날따라 내가 쓴 책들이 차에 있었다. ≪책의 정신: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가지고 와서 주면서 말했다.

“이 책을 일단 읽어보셔요.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제 강의 녹음 파일을 한 번 들어보고 드릴 만한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 선생님 그럴게요.”


그날 게이샤는 책값이라면서 콜드브루 게이샤를 한 병 주었다. 나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받았다. 나오면서 영업시간을 보니 문 닫는 시간은 아홉시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게이샤는 작업복 차림이 아니었다. 가게 정리를 끝내고 옷도 갈아입고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러고 열흘쯤 지났을까, 톡이 왔다. 선생님, 게이샤 다 마셨죠? 택배로 보내드릴 테니까 주소를 알려주세요. 어째야 좋을지 몰라 답을 못했다. 서로가 가진 걸 주고받자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낯설어서 당황스러웠다. 익숙해져야 할 낯섦인지 피해야 할 낯섦인지 너무나 낯설어서 판단이 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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