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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Sep 07. 2019

눈 덮인 킬리만자로

-스핀오프 17

한 달 만이었다. 벌써 칠 년 동안 함께한 인천 사서파 제자님들, 얼굴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현대철학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마르크스부터. 그를 이해하려면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조금 알아두는 것이 좋다. 적어도 아담 스미스는. 마르크스는 현대가 시작되는 19세기 중반에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시대상황을 알아야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한 시간 가량 했다. 그다음에는 책을 읽으며 설명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오기에 그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그러고 나서도 사오십 분쯤 이야기 나누었다.


세 시간쯤 쉬지 않고 말한 셈이다. 한 제자님의 개인 전시회에서 내가 찜해두었던 서예 작품을 받아 들고, 필요한 책도 좀 빌려서 나섰다. 제자님들이 차까지 따라 나와 주었다. 이제 추석 지나고 볼 거니까.  


집에 들어서니 배가 무척 고팠다. 고픈 게 아니라 아플 정도로. 그렇잖아도 오늘은 ‘처리해야지’ 했던 게 있어서 레시피를 확인하고 부엌에 갔다. 토마토소스를 끼얹은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들 작정이었다. 며칠 전에 미트볼이 먹고 싶다는 생각에 돼지고기와 소고기 간 것을 사 두었다. 냉장고에 너무 오래 두면 안 된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반반 넣고, 소금을 좀 치고, 후추를 갈아 넣고, 대파를 쫑쫑 썰어서 넣고, 바질을 좀 넣고 반죽을 했다. 똥그랗게 만들어 보니 쫌 많다. 하나, 둘...... 윽! 스물두 개나 된다. 여섯 개만 프라이팬에 올렸다. 겉이 갈색이 될 때까지 익히고 나서, 데쳐서 껍질 벗겨둔 방울토마토와 바질 토마토소스를 넣고 끓였다. 아마 육칠 분? 탈까 봐 약한 불로 조심조심...... 탱글거리던 미트볼이 단단해지면 다 익은 것이다.


맛있는 냄새를 맡으면서 깨달았다. 스파게티 면을 준비하지 않았구나. 물을 안치고 소금 조금 넣고 끓기를 기다려 넣고 십 분을 맞추었다. 그 사이에 남은 미트볼 열여섯 개를 보관용기에 담고, 올리브 오일을 좀 뿌려두었다. 부드러워져라, 안 존 냄새는 사라져라. 주문을 외우면 확실히 향기로워진다.


미트볼은 냉장고에 넣고 오이피클을 꺼냈다. 아마 지난주쯤이었을 것이다.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에이, 하고 일어나 만들어 둔 것이다. 그런 마음 상태로 만든 것 치고는 꽤 맛있다. ^^


스파게티를 접시에 담고 토마토소스 미트볼을 올렸다. 스마트폰을 켜면서 식탁에 앉았다. 세상에, 열두 시 십팔 분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뭘 먹기에는. 다 만들어 차리고는 망설여진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배고픔도 사라졌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문제는 만든 음식을 어떡하느냐는 것이다. ㅠ.ㅠ


게이샤가 떠올랐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스파게티를 자주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게이샤는 무척 신기해했다. 육십이 다 된 털보 아저씨가 알리오 올리오나, 봉골레 같은 이탈리아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뉴스라는 표정이었다. 자기는 미트볼 스파게티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것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맛도 보장할 수 있느냐고 미심쩍은 듯 물었다.

“허접한 레스토랑보다는 나을 거예요. 솜씨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 좋은 재료를 듬뿍 넣으니 맛이 없을 수 없어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도 뿌리나요?”

“그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라 거의 어디에나 뿌려요. 눈 덮인 킬리만자로처럼. 맛있기도 하고, 약이 될 정도로 완전식품이기도 하니까.”

게이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보아도 표범 같아 보이지는 않아요. 아, 물론 하이에나도 아니시지만. 그래도 노래 가사 속의 주인공과 비슷한 데는 있는 것 같긴 해요.”

뜻밖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잠깐 흘렀다.

“저는 귀뚜라미는 좋아하지 않아요. 라일락은 좋고, 밤은 좋지만요.”

“저도요. ㅎㅎ”

그런데......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아는 걸 보니 요리도 잘하시겠군요.”

“조금은 하죠. 그래도 바리스타인데...... 아무튼, 그러면 맛이 없을 수 없겠어요.”

“올리브유도 이탈리아 움브리오 지역에서 난 프란토이오 종 열매로 만든 걸 씁니다. 과일향에 매운 맛이 좀 나는 거죠.”

“언제 한 번 맛보게 해 주세요.”

그러려면 어딘가 내가 요리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 그래도.

“언제 기회가 되면요.”

“행운이 따라야 하겠군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조금 뜸을 들여야 했다.

“저에게도요.”


다 만들고는 딴생각만 하다가 손도 대지 않았다. 좀 자고 일어나 아침에 먹자. 냉장고에 넣어두면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냥 치우기는 섭섭했다. 사진을 찍어 페북에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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