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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Sep 09. 2019

사건이 되려면

-스핀오프 18 : 

오이 여섯 개, 빨간 파프리카와 노란 파프리카 두 개씩, 무, 피클링 스파이스 한 병을 샀다. 얼마 전에 오이 피클을 조금 만들어 보았는데 금방 다 먹었다. 이번에는 많이 만들어서 제자님들에게도 좀 나눠 줄 작정이었다. 

피클 만들기는 아주 쉽다. 핵심은 피클 물을 만드는 비율이다. 물과 설탕, 식초를 일대 일대 일로 섞는다. 단맛을 좀 줄이고 싶으면 설탕을 조금 적게 하면 되고, 신맛을 줄이고 싶으면 식초를 조금 적게 하면 된다. 어디까지나 ‘조금’이지 ‘많이’ 줄이면 맛은 많이 줄어든다. 피클링 스파이스는 넣는 게 좋다. 향뿐만 아니라 맛의 깊이도 달라진다. 피클링 스파이스는 대개 여섯 가지 향신료로 만들어진다. 겨자씨, 코리앤더, 딜씨드, 흑후추원두, 정향(크로브), 월계수잎, 계피. 


먼저 피클을 담아둘 병을 잘 씻고, 끓는 물로 소독을 해 둔다. 넙적한 프라이팬에 물을 조금 붓고 ‘처음부터’ 병을 거꾸로 세운다. 그래야 함께 열이 가해져서 유리병이 깨지거나 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 소독한 병에 담아야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다. 일 년까지도. 


재료를 준비한다. 오이, 파프리카, 무를 적당한 크기로 썬다. 파프리카는 어떻게 손질하는 게 좋을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유튜브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다. 보면 쉽지만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모르는 것은 설명해 줘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경우가 그렇다. 부엌일 경험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를 수 있다.  

 

재료가 준비되면 큰 볼에 담아서 섞어 두고, 피클 물을 만든다. 물, 설탕, 식초를 일대 일대 일로 섞는데, 나는 언제나 설탕을 조금 적게 넣는다. 거기에 스파클링 스파이스를 좀 넣는다. 피클 물의 양은 준비한 채소가 자작하게 담글 정도면 된다. 적은 것보다는 조금 많은 게 좋다. 


거기에 채소들을 다 넣고 끓인다. 아니다. 말이 안 되지만, 끓기 직전까지만 끓인다. 이게 중요하다. 아삭아삭한 피클을 먹고 싶다면. 그런 다음 불을 끄고 소독해둔 병에 뜨거운 채로 담는다. 그런 다음 곧바로 냉장고에 넣어둔다. 차가워지면 곧바로 먹을 수 있다. 더 빨리 준비해야 한다면 작은 병에 먹을 만큼만 담아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면 된다. 


다 만들고 보니 작은 병으로 18개였다. 아주 쉽고 간단해서 평화롭게 끝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늘 작은 사건들이 생긴다.      


오늘은 칼에 베였다. 워낙 날카롭게 갈아서 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칼질을 하다 보면 무딘 칼은 용서할 수가 없다. 칼 가는 건 쉽기도 하고. 이것도 유튜브 보고 배우는 게 최고다. 살짝 스쳤는데 왼쪽 손 등을 벴다. 피가 펑펑 쏟아졌다. 다행히 깨끗이 소독해서 말려 둔 행주가 있었다. 작은 상처였는데 무슨 피가 그렇게 나오는지. 하얀 행주가 스펀지처럼 피를 빨아들였다. 눈 위에 떨어진 핏자국 같았다. 서랍을 뒤져 밴드를 찾았다. 작은 게 없어서 큰 것을 붙였다. 큰 상처처럼 보였다.

이런 일이 생기면 혼자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하필 왼손을 다쳤으니 오른손 혼자 처리해야 했다. 쉽지 않았지만. 소독까지 해야 한다면 일이 좀 더 복잡해진다. 나는 소독하지 않아도 금방 깨끗하게 아물지만 덧나는 사람은 소독까지 해야 한다. 익숙한 일인 것처럼 조용히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는다. 어디에 부딪쳐서 생긴 것인지 모르는 작은 멍자국들이 다 그렇다. 


피클 물을 부엌 바닥에 좀 흘린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키친타월로 닦아 낸다. 닦다 보면 부엌 바닥을 모두 닦는다. 그래서 이 정도라도 깨끗할 것이다. 


그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집이야?”

“응.” 

“강화도 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잠깐 들를까 하는데, 괜찮겠어?” 

아들은 독립한 뒤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 그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좀 섭섭하다. 속으로만 말한다. 아빠 집인데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당근, 괜찮지.” 

“그럼 이십 분쯤 뒤에 갈게.” 


하던 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작은 접시 하나를 떨어뜨렸다. 와장창! 큰 조각은 손으로 집어내고 진공청소기를 가져왔다. 흡입력이 아주 약했다. 청소기 먼지통이 꽉 차서 그럴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베란다로 가서 청소기를 해체해서 먼지통과 필터를 털어냈다. 다시 조립해서 혹시라도 남아 있을 ‘날카로운 조각’들을 빨아들였다. 하는 김에 부엌 바닥을 전부 훑었다. 쓸고 닦아야 할 걸 닦고 쓸었지만 부엌 바닥은 오랜만에 아주 깨끗해졌다.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들이었다. 

“비번 몰라? 전에 문자로 찍어줬는데......” 

“아, 미안. 깜빡했네.” 

아들은 강화도에서 샀다면서 파김치를 내놓았다. 아내와 함께 풍물시장에 장 보러 가면 유일하게 사 오던 반찬이었다. 

“엄마 생각도 나고, 아빠 생각도 나서. 그리고 이건 광어회야. 엄마하고 늘 가던 그 생선가게에서 샀어.” 

퍼뜩 아내와 함께 누비던 풍물시장 가게들과 자주 가던 밥집이 떠올랐다. 아내의 얼굴도.


“그래, 고맙다.”

물건을 받느라고 두 손이 앞으로 나갔다. 

“많이 다쳤어?” 

조금 놀란 목소리였다. 

“아니, 칼에 조금 베인 거야.”

“밴드가 큰데?”

“아, 작은 게 없어서 큰 걸 붙였어.”

밴드를 살짝 떼어 상처부위를 보여주었다. 

“좀 조심하지.”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면 그제야 별게 아닌 것도 사건이 된다. ^^ 사건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내의 다리를 만져주다가 멍자국을 보면 물었다. 뭐에 부딪친 거야? 아프지 않아? 그러면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자기 몸인데도 몰라? 좀 세게 부딪쳐도 아야, 하고 말지 옷을 걷어 보는 건 아니잖아. 눈도 웃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데. 좀 조심하지. 그럴게. 


“그럴게. 요즘 하는 일은 어때?”

아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작정이라고 했다. 아마 걱정 말라고 그랬을 것이다.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들른 것일까? 끝나자 일어선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서야겠어.”

“잠깐만, 챙겨줄 게 있어.”

피클 한 병, 소고기 장조림 한 병...... 더 줄 게 없나.....? 아, 맞다. 게이샤 콜드브루. 

“이것도 가져가. 게이샤 콜드브룬데 너는 구하기 어려울 거야. 비싸기도 하고 파는 데도 드물어. 아침에 물을 타서 연하게 만들어 마셔도 되고, 커피와 우유를 일대 이로 섞어서 라테로 마셔도 아주 좋을 거야.” 

“아빠가 두고 마셔.”

“하나 더 사면 되니까 가져 가.”

“이 동네에 이런 걸 파는 데가 있어?”

“운전해서 가면 오분 정도밖에 안 걸려. 젊은 바리스타가 만드는 거야. 그러고 보니 너랑 비슷한 나이겠구나.”


아들이 떠난 뒤 게이샤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게이샤 콜드브루 있어요?’ 

‘예.’ 

‘지금 가지러 갈게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게이샤도 왼손을 보고는 많이 다쳤느냐고 물었다. 아들에게 설명한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랬더니 게이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요?” 

“칼에 베인 게 신나는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아, 그랬나요?”

이번에는 마주 보고 웃었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가져간 피클 한 병을 주었다. 

“이걸 만드시느라고 다치신 거예요?”

“그런 셈이죠.”

“많이 만드셨어요?”

“남아서 가져온 건 아닙니다.”


게이샤는 콜드브루 값을 받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오만 원짜리 지폐가 있어서 거기에서 일하는 다른 여자분께 쥐어 주었다. 게이샤는 차까지 따라 나왔다. 

“선생님 책을 다 읽었어요.”

“어떤 책이 재미있던가요?”

나는 늘 재미있었냐고 묻는다. 재미없다면 읽을 필요가 없다. 

“모두 다요.”

뜻밖이었다. 

“정말 자주 뵈어야겠어요. 다시 연락드릴 테니까 꼭 시간 내어 주셔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게이샤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돌아섰다. 문 앞에서 다시 잠깐 돌아보더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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