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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Sep 03. 2019

새벽의 칼질 소리

-스핀오프 16 :  색이 바랜다

일찍 자고 일찍 깨는 날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고요한 집안을 둘러본다. 부엌에는 언제나 일감이 모여 있다. 거실을 지나다 보면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부엌일부터 시작한다. 지난밤에 널부러두었던 것을 갈무리해서 냉장고에 넣었다.


밤에는 왜 간이 커지는 걸까? 갓 무친 나물들이나 채소들을 아일랜드에 그대로 두었다니. 상하면 마음 아파하면서. 설거지하면서 포도를 몇 알 입에 넣었다. 끝날 때쯤 배가 고팠다. 아, 일어나서 물 마시고 혈압약도 먹었구나. 그것들이 위를 자극했나 보다. 요즘은 약을 잘 챙겨 먹는다. 긴장이 풀렸을 텐데 혈압은 그대로다. 아니구나,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걸까?

뭘 좀 먹을까 둘러보다가 며칠 전에 사둔 백합이 생각났다. 산지에서 직송한 것이라 일주일쯤은 거뜬하다. 그래도 가능하면 빨리 먹는 게 좋다. 싱싱할 때는 그냥 끓이기만 해도 맛있으니까. 찬물로 바락바락 씻고 물에 담가 놓았다. 지난번에 그냥 끓였더니 너무 짰다.


지난밤 데쳐서 풀어놓은 시금치가 담긴 믹싱볼도 ‘처리해야’ 했다. 다진 마늘을 넣고, 대파를 쫑쫑 썰어 넣어야 하는데...... 대파 손질해 놓은 게 없다. 냉장고 채소 칸에서 꺼내 손질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당장 쓸 만큼만 남겨두고. 고요한 집안에 칼질 소리가 음악처럼 울려퍼진다.

 

어린 시절 새벽 잠자리에서 듣던 칼질 소리.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나 아내의 칼질 소리가 얼마나 다정하게 느껴졌던가. 그래서 문제였을 것이다. 집안일이 얼마나 엄청난 노동인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남자는 당연히 보살핌을 받고, 여자는 새벽잠을 설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 여자는 새벽잠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니 그 소리가 정겨웠겠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겠지. 그 평화가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그런 것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다진 대파를 듬뿍 넣고, 청양 고춧가루를 조금 치고 조선간장을 조금 치고, 참기름을 좀 넣고 무쳤다. 맛을 보니 짜다. 간장을 많이 넣었나 보다. 우쒸~

밥을 한 숟갈 뜨고 금방 무친 시금치나물, 어제 무친 참나물, 나흘쯤 된 오이나물, 열흘쯤 된 표고버섯 조림을 넣고 비볐다. 내가 나물비빔밥이나 야채 덮밥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았다. 싱거웠다. 그러고 보니 소고기 장조림이 있다. 어제 만든 것이다. 남아 있던 조개국물에 양파와 시금치를 조금 넣고 맑은 된장국도 끓였다.


한 입 먹다가 이 주 전쯤에 데쳐서 껍질을 벗겨 넣어둔 방울토마토가 생각났다. 그거 몇 알 먹자. 꺼내 보니 맨 위 몇 개는 하얀 서리를 맞았다. 골라내 버리고 다시 끓였다. 식으면 다시 병에 넣어 냉장고에 넣어둬야지. 병도 씻어 엎어두었다. 이번에는 서리 내리기 전에 먹어야지.


어질러진 거실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걸레부터 빨았다. 지난번에 쓰고 그대로 던져두었던 것이라 금방 깨끗해지지 않았다. 빨랫비누도 동이 나고. 어딘가 있을 거야. 세탁기 위에 있는 장을 뒤져보았다. 두 개가 있다. 비누칠을 듬뿍하고 아마 서너 번은 치대고 헹구고 했을 것이다. 내 몸이 전에 비하면 많이 유연해졌다. 이 정도 할 수 있는 걸 보면.


청소기를 들고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구석구석 빨아들이고 나니 땀이 좀 흘렀다. 걸레질은 로봇청소기에게 맡기고 산책 나갈 준비를 했다. 참 희한하게도 집안일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운동’이 아니란다. 왜 그런 걸까? 말도 안 돼.


현관을 나서는데 세상을 떠난 아내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이 시간에 출근을 했고, 아내는 아들을 안고 나와 다정하게 배웅해 주었다. 아들은 어른이 되어 떠났고, 아내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니 바깥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온다. 나는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몄고. 파티마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먼 곳에서 눈길을 거두세요. 저절로 그리 되는 날이 오겠지요. 요즘은 잊고 지내는 날이 많답니다. 저도 그게 좀 신기해요. 지금도 아내가 아닌 당신이 떠오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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