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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Sep 14. 2019

네 번째 식사

-스핀오프 20: 사누끼 볶음우동

명절이다. 그래도 별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아들은 오후 늦게 집에 왔다. 그제야 명절이라는 걸 알았다. 

배고프지? 

응. 

밥 차려줄게 많이 먹어. 

어릴 때는 채소를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잡채를 해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오만(?) 가지 잡채를 섞어 만들었다. 양파, 감자, 당근, 파프리카, 피망을 채 썰어 하나하나 볶았고, 청경채는 데쳐 두었다,  목이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도 채 썰어서 볶았다. 시금치도 넣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지 않았다. 한 단에 육천 원이라니. 대신 청경채는 이천 원, 예닐곱 뿌리나 되는데도. 


고기는 소고기 안심을 넣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밥을 먹는데 아주 맛있기를 바랐다. 삼십 퍼센트 세일하기에 샀다. 두 덩이나. 그래도 돼지고기보다 적어도 일쩜오 배는 비싸다. 돼지고기도 맛있지만 소고기 안심은 훨씬 더 깊은 맛을 낸다. 글쎄, 느껴보셨는지 모르겠다. 우아한 잡채의 맛.


잡채를 만들 때 다른 것은 한꺼번에 볶아도 되지만 고기와 양파는 따로 볶는 게 좋다. 특히 양파는 후추를 뿌려 볶으면 그 풍미가 아주 기가 차다. 그러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고기 역시 밑간을 해 두었다가 볶는 게 좋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마늘, 좋은 간장, 물 조금(간장 희석용), 참기름, 후추 듬뿍 넣고 밑간을 해두는 것이다. 


잡채는 물에 담그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끓는 물에 10분 익히면 된다. 이때 육수를 쓰면 훨씬 맛있다. 당면은 물을 빨아들여서 뻣뻣하던 것이 탱글탱글하게 되는 것이니까. 다 익으면 꺼내서 가위로 적당히 자르고 ‘참기름’으로 버무려둔다. 잡채 당면의 맛은 참기름이 만든다. 이러고 나면 그냥 다른 재료와 함께 버무리면 된다. 


다른 채소는 한꺼번에 때려 넣고 볶으나 따로 하나씩 볶으나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뭐, 내가 둔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주 ‘정통’으로 하는 분들은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볶은 다음에 나중에 당면과 버무린다고 한다. 아참, 간은 양조간장과 굴쏘스로 한다. 조금 싱거울 정도로. 


당면과 잡채, 소고기 볶은 것을 큰 볼에 담고 잘 버무리면 된다. 이때 노두유를 조금만 넣고 버무리면 잡채가 아주 맛있는 색깔로 변한다. 다 버무린 뒤에 맛을 보길 권한다. 너무 싱거우면 그때 소금을 넣도록 하시고. 접시에 담고 나서는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참깨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잡채 한 접시와 계란국, 땅콩조림, 장조림, 들기름에 무친 열무김치를 반찬으로 내놓았다. 밥을 조금 많이 펐다. 아들은 이 모든 걸 발우 공양하듯이 먹어치웠다. 맛있어서 다행이다. 잘 먹는 아들을 보면서 행복하면서도 조금은 슬프다. 내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 줄 안다는 것도.      


첫 번째 식사를 마치고 새로 산 촬영장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내가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찍어두고 싶어 한다. 내가 부엌 일하는 동안 뒤에서 찍은 것을 보여주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동작, 무표정한 얼굴(세수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빗지 않은 꾀죄죄한), 개수대에서 그릇을 씻는 모습, 다 된 음식을 담는 무딘 손길...... 게다가 어수선한 부엌 배경. 

이대로 내보내서는 안 되겠어. 자고 일어나 세수 안 한 얼굴을 내 보이는 것 같아. 찍을 거면 부엌을 좀 정리해야겠어. 나와 있는 것들은 모두 찬장에 집어놓고, 수많은 양념통들도 정리해야겠어.


보기 좋기만 하구먼. 아들의 눈은 달랐다. 아무튼, 안 되겠어. 그래요. 이건 어쨌든 레퍼런스로 찍은 거니까. 제대로 찍을 때는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 자연스러움을 해칠 정도로는 하지 마시고.      


산책을 다녀왔다. 아들은 걷는 내 모습도 찍어두고 싶다고 했다. 물론 오늘은 레퍼런스로. 두 시간 정도 걸었다. 그동안 아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나를 찍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아들과 대화는 참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조심스럽다. 의견이 다를 때마다.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고. 어쩌면 옛날에 서로를 힘들어했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이다. 그 입장의 차이가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에 소통과 관계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을 끝없이 안아줘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이율배반적이다. 벌써 서른여섯이 된 아들도 어른이고, 어른으로 대접해야 한다면. 


나는 둘 다 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아버지이니까. 단순한 논리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면 뭐가 어렵겠는가. 생각해 보니 이게 아버지와 아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모든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가 자기는 관대하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기가 '잘 해준다'는 평가에 인색해야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면 더욱더.  

아들은 샤워하러 들어갔고, 나는 잠깐 누워서 쉬었다. 두 시간을 걸었더니 조금 피곤했다. 이러다가는 잠들겠다. 일어나서 먹을 걸 준비하자. 스파게티 알레 봉골레를 만들어주려고 사둔 바지락이 있다. 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그래두고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십 분쯤. 부엌으로 가니 아들은 거실에서 촬영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한쪽 화덕에 일 퍼센트 정도의 소금물을 얹고 불을 켰다. 유투브를 보면 바닷물 정도로 짠 물을 쓰라는 사람이 많은데, 그러면 너무 짜다. 끓으면 롱파스타를 넣고 9분 삶을 것이다. 이 파스타는 9~11분 요리하라고 쓰여 있으니. 


바지락을 씻어서 냄비에 담고 화이트 와인을 좀 부어 불을 켰다. 냉동실에서 큰 새우 여섯 마리와 그린 홍합 네 개를 꺼내 녹이고. 마늘은 편으로 썰어 바지락 삶는 냄비에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었다. 큰 새우와 그린 홍합과 파슬리 다진 것도 넣었다. 


파스타가 다 익으면 꺼내서 물기를 빼고 올리브유로 버무려둔다. 파스타 맛은 올리브유가 가장 중요하다. 바지락이 다 익으면 파스타를 조리듯 볶아야 한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조금 두르고 파스타를 올린다. 거기에도 파슬리를 조금 뿌리고. 조개 삶은 국물을 한 국자 떠서 팬 주위에 두른다. 올리브유와 조개국물로 파스타를 조리는 셈이다. 


조리다가 바질을 좀 뿌리고 그 위로 올리브유를 다시 조금, 조개국물도 조금 뿌리고 다시 좀 더 졸인다. 국물이 졸아들면 큰 접시에 파스타를 올리고, 조개도 그 곁에 담는다. 큰 새우 세 개, 그린 홍합 두 개, 바지락 스물여덟 개. 마지막으로 그 위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 가루를 뿌려준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 본 한 제자님이 그랬다. 선생님은 좋은 재료를 쓰기 때문에 맛이 없을 수가 없어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 좋은 재료가 어떤 불로, 얼마 동안, 어떤 순서로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겠지만. ^^


담가 둔 오이피클과 함께 스파게티를 먹었다. 아들을 좀 더 많이 주었고, 나도 좀 먹었다. 이번에도 피클 한 병까지 발우 공양하듯 먹어치웠다. 오랜만에 아빠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밥을 먹었지? 이렇게 옆구리를 찔러야 그래, 라는 대답을 듣는다. 


시원한 것을 마시고 싶다기에 진토닉을 타 주었다. 진은 조금만 넣고. 집에 웬 술이 있어? 아빠가 가끔 마셔. 옛날 생각하면서. 위스키도 있는데, 하이볼을 타 줄 수도 있어. 오렌지위스키도 만들어줄 수 있고. 

     

저녁을 먹고 난 뒤 아들은 나에게 신체훈련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가르치는 배우들에게도 날마다 하라고 하는 거야.” 

쉽고 가볍고 간단하지만 한 시간쯤 걸리는 방법이었다. 가만히 서서 삼십 분쯤, 누워서 삼심 분쯤. 발바닥에는 둥근 나무막대를 받치는데, 지압받는 느낌으로 조금 아팠다. 몸의 균형을 잡는데도 도움이 되지만 하고 나면 잠도 아주 잘 잔다고 했다. 나는 ‘잠을 아주 잘 잔다’에 꽂혔고. 


아들은 아주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예상 질문도 모두 봉쇄해 버리는 꼼꼼한 설명. 맞아, 쟤 성격이 그렇지. 무심할 때는 아주 무심하지만...... 무심한 건 나를 닮은 것이고...... 이런 경우라야 아들의 성격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한 번 하고 나니 끊임없이 하품이 났다. 여덟 시간 자고 잠깐 깨었다가 다시 네 시간을 더 잤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밥 차릴 준비를 했다. 오늘은 끓여서 얼려둔 갈비탕이다. 충분한 양을 꺼내 해동을 했다. 이십 분이나 걸렸다. 그러고 나서도 십 분은 끓여야 했지만. 양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꽁꽁 얼렸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준비하기가 쉽다. 미리 마련해 두었던 것이니까. 

아들 방에 가 보니 자고 있었다. 살짝 불러 보았다. 아침 먹을래? 응. 그럼 나와. 나오면서 보니 아침은 아니었다. 열두 시를 넘겼으니. 아점이구나. 누가 뭐래? 뭐, 그냥.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 번째, 아들은 발우 공양하듯 다 먹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맛있게 만든 것인지, 아들이 음식 먹는 습관이 그런 건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작은 채소 조각도 다 쓸어 먹었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밥을 다 먹고 말했다. 

아빠, 어제 그 게이샤 콜드 브루로 만든 카페라테 정말 맛있더라. 

응, 알았어. 타 줄게.

오랜만에 마주 보며 커피를 마셨다. 참 할 이야기가 있지. 

이 주 뒤에 엄마한테 가기로 한 거 말이야. 이번에는 차 가지고 가지 말자. 너무 힘들더라. 케티엑스 타고 대구에 가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엄마한테 갔다가 케티엑스 타고 돌아오는 걸로 하면 어떻겠어? 

그래요. 

케티엑스 출발 시간은 오후 두 시 반쯤으로 하고, 그러면 도착이 네 시 이십 분쯤이니까. 주변을 좀 어정거리다가 자고, 그 담날 아침에 나서면 될 것 같아. 글고 그날 밤에 케티엑스로 돌아오고. 

그래요. 그럼, 아빠가 케티엑스 예약해요. 호텔은 내가 예약할게.  

좀 좋은 호텔로 하고, 조식 포함으로 예약해. 

아들은 대구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예약하고 보여주었다. 스탠더드가 없어서 그보다 조금 더 나은 방으로, 조식 포함, 호텔만 돌아다녀도 시간이 갈 것 같았다. 

그럼 그날 오후 한 시 정도까지 네 집으로 갈게. 차를 거기 세워 두고 다녀오자.

그래요. 

나는 호텔 예약도, 렌터카도 모두 내가 예약하고 치를 생각이었다. 아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뺏아(?) 갔지만. 


아들은 아들 방으로 갔고, 나는 서재로 갔다. 나는 화요일까지 써야 할 원고가 있어서 읽어야 할 것을 읽었고. 한참 읽는데 아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서재에 왔다. 

이제 갈려고. 

아, 그래. 저녁 안 먹고? 

다 준비해 뒀는데, 금방 해줄게. 

저녁 식사는 살짝 볶은 사누끼 면에 불고기 국물을 붓고, 불고기를 얹어 줄 생각이었다.  

배가 안 고파. 

아들은 배가 안 고프면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잘 안 먹는다. 그 성격을 아는 나는 더 권하지는 않았다. 채비한 걸 보니 나서면서 뭘 좀 찍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늦으면 안 된다. 해가 질 테니까. 

우리는 껴안고 뺨 뽀뽀를 했다. 잘 가라, 밥 잘 챙겨 먹고. 이 주 뒤에 보자. 응, 아빠도 잘 지내. 아들을 떠나보낸 뒤 대문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들어왔다. 

네 번째 식사, 일 인분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일 인분만 마련해서 먹었다. 뭐, 다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니 쉽고 간단했다. 슬프게도 맛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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