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잣죽

-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스핀 오프 01

by 강창래

몸의 기억은 신통하다. 이제 아침 여섯시에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도 잠을 깬다. 머리맡에 있는 벨 버튼을 눌러보았다. 아내가 도움이 필요하면 누르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실로 뛰었다. 벨 소리가 나면 온 집안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요했다. 귀를 기울여보았다. 벨 소리가 들리는지. 아주 희미하게 들릴 듯 말 듯. 아들 방에 가 보았다. 어젯밤 외박해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 방을 거쳐 서재로 갔다. 다시 벨 버튼을 눌러 보았다. 이제 끝난 줄 알면서도 몸은 잠깐 놀랐다. 발은 침실로 향했고. 집안 어디도 놀라지 않았다.

아내가 누워 있던 침대에 앉아 조금 울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아니,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워서. 몇 년 된 집이었지만 이렇게 낯설 수가 없다.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머리를 감아야겠구나. 다시 나와서 옷을 벗고 들어가 샤워를 했다. 비누칠은 날마다 하지 않아도 돼.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늘 샴푸와 린스를 쓰고 바디샴푸도 썼다. 더 이상 말이 없다. 전에는 한 마디 했을 텐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떠오르는 게 있었다. 냉동실에 잣죽이 있다. 아내가 잘 먹기를 바라며 만들어 얼려 두었던 것이다. 영 못 먹게 되고서 잊었다. 잣죽을 꺼내 해동해서 믹서기에 갈았다. 편집자의 아내가 사서 보내준 황금똥빵 하나, 수프, 카페라테로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아침이 간단할 수도 있구나. 늘 부엌에서 두세 시간을 허둥대야 했는데. 텔레비전을 켜고 보면서 먹었다. 씹을 것도 없는 것을 천천히 오랫동안 꼭꼭 씹어가며. 투병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놓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돈을 빌려주겠단다. 이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느냐면서 웃는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나름대로 잘 벌고, 나도 필요한 만큼은 번다고 했다. 전화한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나도 잠깐 말을 잃었다. 곧 전화가 끊어졌다.

메일이 하나가 와 있었다. “선생님, 시간 되시면 한 번 뵈어요. 연락 주셔요.” 그게 전부였다. 아내 장례식 때 모두가 돌아간 뒤 까만 원피스를 입고 혼자 들렀던 사람이다.

“가게 문 닫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고마워서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나중에 또 연락드릴게요.”

나는 '그래요' 대신에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잣죽 레시피

잣은 대개 100그램이나 200그램 단위로 포장되어 있다. 나는 잣죽을 한번 끓일 때 50그램을 갈아서 쓴다. 조금 많은 편이지만 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만들면 세 번쯤 먹을 양이 된다. 갈 때는 우유를 넣는다. 종이컵 반 정도. 밥은 두 공기쯤. 물은 이것들 네댓 배. 이런 비율로 죽을 쑤면 아주 고소하다. 다 된 죽을 믹서기에 넣고 갈면 수프가 된다.


잣을 이렇게 많이 넣으면 고칼로리 음식이 된다. 환자나 잘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좋다. 불포화지방산이 많아서 혈관이나 피부에 좋고, 레시틴은 두뇌활동에 도움이 되며, 미네랄, 비타민 B, E가 신진대사를 촉진시켜서 힘이 난다. 한마디로, 너무 많이 먹지만 않으면 무조건 몸에 좋습니다.


밥 대신 생쌀을 쓴다면 3대 2로 멥쌀과 찹쌀을 섞어서 믹서기에 적당히 간다. 수프 만들 게 아니라면. 갈 때 역시 우유를 조금 넣고. 그렇게 준비된 잣과 쌀(밥)을 냄비에 넣고 물은 네댓 배쯤 넣고 20분쯤 불 앞에 서서 저어가며 쑤면 된다. 정성들여 죽을 끓였다고 하면 뜨거운 불 앞에서 정성들여 저었다는 말이다. 저어주지 않으면 잣가루와 밥(쌀가루)가 가라앉아 타 버린다. 되직한 정도는 저어가며 물을 더 부으면서 조절하고.


나는 브로콜리를 데쳐두었다가 어디든 하나씩 올려 먹는다. 예쁘고 맛있고, 건강에도 좋으니까.


#잣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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