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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Oct 16. 2019

코민스키 메서드

-스핀오프 25: 컬래터럴 뷰티

냉장고에는 지난 며칠 동안 먹다 남은 것들이 랩에 싸여 있었다. 어제 ‘새로운 요리’를 하면서 알았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다가. 혼자 먹으면서 늘 이삼 인분을 만드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잘 알면서도 ‘넣어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부엌에 들어서면 언제나 새로운 요리를 한다. 아내를 보살피면서 생긴 습관일 것이다. 아내는 이삼일 안에는 같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번에는 뭘 해줄까? 늘 고민하고 생각나지 않으면 묻기도 했다. 그렇게 길들여졌다.


원래 나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는 같은 걸 주어도 아무 말 없이 잘 먹었다. 퍼뜩 떠오르는 것은 콩나물이다. 내가 해 주던 밥을 먹으면서 아내가 그랬다.

“기억 안 나? 대치동에 살 때 콩나물국에 콩나물무침에, 콩나물부침을 일주일 내내 내놓았던 적이 있었잖아. 차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는데 당신은 한 번도 반찬투정을 하지 않았어.”

IMF 시절 이야기다. 나는 기억에 없다. 언제나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그때는 아들과 갈등이 컸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혼이 나가 있었다. 몸무게가 저절로 15킬로그램이 줄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평생 빼고. 싶었던 살이 저절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살이 빠졌다는 사실이 좋았다. 자주 쓴웃음을 지었다. 내 기억은 그런 것들뿐이다.

우선 에그누들 볶음을 꺼냈다. 소고기를 조금 넣어 맛을 내고 채소를 많이 넣어서 볶은 것이다. 맛있는 간장으로 간을 했고. 레인지에 데워서 한 젓가락 먹어 보니 맛있다. 그대로 두고 국물을 만들었다. 조개국물을 꺼내 작은 냄비에 붓고 끓인 다음 풀어놓은 달걀을 실처럼 흘려서 달걀탕을 만들었다. 실처럼 흘려야 맑은 달걀탕이 된다. 조개국물이 없다면 맹물에 치킨스톡을 조금 넣어도 맛있다. 한우 스톡이나 채소 스톡도 좋고. 거기에 다진 마늘 조금, 굴소스도 조금 넣고. 그저 싱거움이 가실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 <코민스키 메서드>를 켰다. 평생 액팅 코치로 살아온 코민스키의 대사에 자주 울컥한다. 오늘은 이 장면에서. 코민스키가 제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오랜 친구가 암으로 죽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죽은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자네들 얼굴이 떠올랐어. 이런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무자비한 정도로 비정한 현실 속에 연기자들을 위한 금덩이가 있으니, 잘 발견해서 간직해야 한다. 그게 연기자들의 재산이다.

 

연기는 삶의 연장이라는 말이었다. 글이라고 다르겠는가.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그 세월이 나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여유로워졌다. 중국에 간 데이지는 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산책 나갔다가 중국사람들이 모여 태극권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움직임을 보는데 선생님이 떠오르지 뭐예요. 그날, 저에게 푸타네스카 만들어주시던 모습이 그랬어요. 음식을 만드는 순간순간을 즐기는 듯 몰입하시더라고요.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이셨어요. 찍어두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 참았답니다.  


태극권의 동작으로 요리하는 사람이 되었다니.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해서 참 좋은 일이다. 주변사람들도 좋아한다. 내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 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육십이 넘어서야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니.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난날 내 서툴고 거칠었던 내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연애 시작했어.”

“와, 축하한다. 언제 같이 와. 아빠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이런 소식을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아들은 잘 안다. 고맙게도.

“조만간 그럴게요. 그런데 내 방에 잠깐 가서 여권 있나 좀 봐 줄래요?”

전화기를 들고 가면서 말했다.

“외국 나갈 일이 생겼어?”

“응, 애인이란 다음 달에 동남아 다녀오려고.”

“그래, 일상을 함께 해 봐야 서로를 좀 더 잘 알 수 있지. 여권이 여기 있구나. 다음 주 만날 때 가져다줄게.”

“그래요. 아빠도 즐겁게 잘 지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니 잘 되었다. 아들이 애인을 데리고 오면 먹고 싶은 걸 만들어 주고, 갈 때는 소고기장조림을 좀 싸주어야지. 참! 아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코민스키 메서드 봤어? 너처럼 액팅 코치하는 사람 이야기이던데.”

“응, 재미있게 봤지.”

“안 봤으면 보라고 하려고 전화했지. 그럼 되었어.”

식탁에서 일어나 그릇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고 가스레인지 근처를 좀 닦고 재활용 쓰레기를 묶어서 들고 나섰다. 버리고 산책길로 들어서는데 다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도 연애하면 알려줘야 돼.”

“그럴게.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응.”

“싱겁기는......”

산책길로 들어서니 봄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봄이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다. 파티마가 떠올랐다. 이어서 데이지가, 이어서 게이샤가. 두 시간쯤 걸었을 것이다. 집에 들어서면서 보니 세 사람에게서 톡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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