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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Dec 14. 2019


여전히 유효한 최고의 일본인론

-1980년대의 베스트셀러: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쓴 책이 분명한 논거를 바탕으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이다. 최근의 책들까지 거의 그랬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그런 점에서 달랐고, 그래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거북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격찬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의 곧바로 영문판과 불어판까지 출간되었다. 아직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80년대라는 시기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86년판에 당시 일본과 한국의 ‘놀라운 평가’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일어판이 먼저 나왔다. 한국어판은 그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어령은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먼저 배운 세대다. 그는 한국인 문학가로서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쓴 책을 일본 독자들이 전차 안에서 읽는 것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기회가 왔을 때 온몸을 불태워 썼다. 다 쓰고 나니 ‘다 사위어버린 숯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필자는 찰스 다윈이≪종의 기원≫에서 사용했던 어법이 떠올랐다. 다윈은 당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수사학적 재능이 대단했던 그는 재미있는 어법을 선택한다. 당시 유행하던 베이컨식 경험주의에 입각한 ‘겸손한 태도’에다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썼던 것이다. 읽기 쉽게 쓰지 않았다면 그의 주장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내용은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를 탐험하면서 보고듣고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했으며, 영국에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차근차근 검토한 뒤에 쓴 것이니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어령 역시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겸손한 태도로 글을 시작한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다녔고, 거기에서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배웠다. 이 책은 바로 그때 시작됐다(그만큼 오래되었다).  어렸기 때문에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듯 일본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당돌하게 모험하듯이 쓴다. ‘그러니 좀  불편하더라도 너그럽게 읽어 달라’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송곳처럼 정확하고 아프다.  


먼저 그동안 나왔던 수많은 일본인론의 비논리를 지적한다. 거기에는 한국에 1974년에 번역출간되었던 베스트셀러 ≪국화와 칼≫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동양의 특징을 일본의 특징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오류가 아주 많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일본인 삶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든다. 어디에서나 축소지향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때 세계 최고의 전자제품을 만들어 냈던 것은 축소지향적인 문화의 성공적인 발현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는 일본인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축소지향의 문화를 가진 일본인들이 확대지향으로 방향을 바꿀 때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국제사회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지 조목조목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경고한다. 일본인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난쟁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확대지향의 일본은 망하고 말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문예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을 읽고 ‘조금 발끈’하는 태도를 보였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하나인 ‘사케이借景’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그의 논지는 간단했다. 이 세상의 정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든 다 인공적인 것이다, 그리고 인공적인 것은 모두가 ‘축소된 것’인데 굳이 일본의 정원만 ‘축소지향’이라니,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그 논리를 가지고 질문으로 바꿔보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인공적이고 축소된 정원은 다 같은 것인가? ‘어떻게 인공적이고, 얼마나 심하게, 어떻게 축소되었는지’에 따라 다를 수는 없는가? 이어령은 일본식 정원이 얼마나 심하게, 어떻게 축소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은 “정원이 다 정원이지 뭘 따지느냐”고 한 것이다. 그는 유사성이 차이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가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걸까?


그런 그가 2013년에 신년 인터뷰를 하면서 ≪축소지향의 일본인≫를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어령의 책은 ‘일본은 축소할 때가 좋은  모습이다’라는 메시지인데, 책 중에 ‘잇슨보시(一村法師·일본 이야기에 등장하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동자)’ 이야기가 나오지만  잇슨보시는 작아도 강력한 존재다. (중략) 3·11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중략) 좀 더 성장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축소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 본질적인 변화라고 본다. 안전하고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그리고 작은 것을 소중히 하는 발상이다."* 그는 책의 내용에 공감했던 것이다.


*경향신문 2013년 신년기획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301072206075


이 책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테디셀러가 되어 거의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읽힌다(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아직도 판매되고 있다). 책의 내용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의 역사왜곡과 비상식적인 외교행태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니 한국인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다. 일본에 지배당하며 겪었던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는 잘 알면서도 우리를 괴롭혔던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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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아일보 2019 12월 14일자에 실렸습니다. 신문지면이 좁아 위의 내용에서 찰스 다윈과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이야기는 뺐습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1213/9879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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