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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Dec 26. 2019

201Q

-스핀오프 38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다. 산책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아주 연한 붉은색 무늬가 조금 섞인 하얀 고양이가 다가왔다. 길고양이들은 대개 사람을 피한다. 다가가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놈들이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살던 집사에게 하듯 장난을 건다. 만져주었다. 그르렁거리며 눈을 감고 손 위로 엎어진다. 털은 더없이 깨끗하고 부드럽다. 윤기도 흐른다. 들어 올려 주었더니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이런 길고양이는 본 적이 없다. 가슴이 설렜다. 안으니까 안긴다. 조금도 비틀지 않고. 집 쪽으로 조금 가다가 내려놓았다. 안 돼.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안다. 행복한 일이지만 감당해야 할 것들도 무척 많다. 


고양이는 내려놓자마자 내 발을 잡고 다정하게 장난을 친다. 손을 내밀었더니 한참을 잡고 놀았다.  이제 그만, 가야 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듯 따라왔다. 갈림길이 가까워지자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더니 거기에서 나를 바라보고 섰다. 나도 마주 보고 섰다. 오 분쯤?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하얀 고양이는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돌아갔다.


집으로 들어와서도 그 하얀 고양이가 눈에 밟혔다. 밤늦게 만났던 그 자리에 가보기도 했다. 거기에 있을 리 없지만. 밤잠을 설쳤다. 아점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고양이를 만났던 곳에 다시 가 보았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벤치에 앉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 비교적 큰 마트가 있어서 고양이를 위한 통조림을 하나 샀다. 뚜껑을 따 놓고 나는 조금 떨어져 앉았다.


백팩에서 ≪1Q84≫를 꺼내 읽던 곳을 펼쳤다. 처음으로 마법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아오마메(여주인공)에게 두 개의 달이 보이기 시작했고, 잠든 쓰바사(성폭행당한 어린아이)의 입에서 리틀 피플 다섯 명이 나와서 아마도 공기 번데기라는 걸 만드는 장면을 읽었다. 1Q84의 Q는 9를 대신한 것이다. 소문자 q가 9와 비슷한 모양이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의문의 해'라는 의미에서 Question을 붙였다. ‘아무리 먼 곳으로 가려고 해도’라는 부제가 붙은 21장을 읽고 있었다.


드디어 그 고양이가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통조림에 접근했다. 어제 그 친근하고 스스럼없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길고양이의 태도였다. 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와서 편하게 먹어. 어제처럼. 소용없었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통조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좀 물러났다. 그제야 다가와서 먹기 시작했다. 내 쪽에 대한 경계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럼 어제 너는 누구였니? 잘 먹기에 내가 조금 다가갔다. 고양이는 곧바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온 김에 공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책을 백팩에 넣고 어깨에 맸다. 혼란스러울 때는 걷는 게 가장 좋다. 걷는 동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그날은 더 혼란스러운 일이 겹쳤지만.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걸음 수로는 구천 걸음쯤. 아마 한 시간쯤 지났을 것이다. 백 미터쯤 앞에 아름다운 사슴이 서 있었다. 내 쪽을 향해. 사슴이다! 오 년 가량 이 공원 구석구석을 다녀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아니, 여기에 사슴이 살고 있다니. 이십 미터쯤까지 가까워졌을 때 사슴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발걸음을 내 디디기 시작했다. 열 걸음쯤 가더니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멈춰 섰다. 여기에 사슴이 있을 리 없어.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슴은 숲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멈춰 선 나를 두 번 더 돌아보았다. 마지막에 고개를 돌렸을 때는 조각처럼 굳어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슴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한없이 낯선 세상이 펼쳐진다. 집에 들어서는데 아들에게서 톡이 왔다. 꽃다발이었다. 애인과 함께 엄마가 잠든 수목장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잠깐 생각하다가 답을 보냈다. ‘아빠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줘’


어쩌면 지난 이 년 동안 끊임없이 아내를 따라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관성처럼. 나는 언제 죽게 될까? 끊임없이 그 질문을 했다. 갑상선에 큰 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이제 나도 암으로 죽게 되나 보다. 두렵기도 했다. 죽음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삿바늘로 물을 뽑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이어진 여러 가지 검사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었고(설사 갑상선 암이라고 해도 적어도 당장은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   다음 날부터 다시 소화불량이 찾아왔다. 집 앞 내과에서 위염 약을 지어먹었다. 그때부터 내 몸도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약을   먹으면 속은 편했다. 식욕은 떨어져 하루 한 끼만 먹었다. 그것도 적은 양으로. 그러면서도 날마다 두 시간씩 파워워킹을 했다.   군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에너지가 솟구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독서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네 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가뿐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변화는 요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관성의 작용이 심했던 그 시기에 습관대로 사람을 살리는 음식을 날마다  만들었다. 그것이 나를 살려냈을 것이다. 젊은 시절처럼 네 시간만 자도 거뜬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고. 가끔 만나는 사람들  얼굴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했다.


비로소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이 년이나 지난 이제야. 아마 둔해서 그럴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고양이와 사슴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누군가가 바늘로 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내가 떠나고 2년이 지난 뒤에야 분명히 느낀다. 제3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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