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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Dec 30. 2019

이성친구?

-스핀오프 34

새벽 네시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지만 알람 소리에 깼다. 잠이 좀 모자라겠지만 뭐, 나중에 좀 자면 되지. 외출 준비가 끝나갈 때쯤 파티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파티마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제네시스 신형이었다.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전에는 이 차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쏘카예요.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차를 골라 탈 수 있어서 좋아요. 오늘은 아주 비싼 걸 빌렸어요. 뭐, 잠깐이니까.”

“아, 그렇군요.”

가까운 병원이라 금방 도착했다. 요즘은 어디나 주차난이다. 주차 공간이 날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먼저 내렸다. 검사 예약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준비해온 대변검사 통을 전해주고, 오줌을 받아주고 혈압을 쟀다. 134/59였다. 혈액검사를 위한 채혈을 했다. 이런 종류의 검사는 처음이다. 내시경 검사를 하는 김에 이런저런 기본적인 검사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혈액이 많이 필요해서 두 번 채혈할 겁니다.”

주먹 쥐고, 고무줄로 묶고, 주먹 펴고...... 조금 따끔했다. 주삿바늘이 조금 큰 것인가 보다.

수없이 많은 주사를 맞으면서 아내는 통증을 호소했다. 주사자국이 아물기도 전에 끝없이 주사를 맞았다. 혈관을 잘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주사를 맞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삿바늘을 보는 건 아팠다. 주사자국으로 멍든 아내의 팔과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시경만 남았다. 대기실에 보니 파티마가 들어와 있었다. 겉옷을 맡기고 내시경실로 갔다. 목부분에 마취제를 뿌리고 마우스피스를 입에 끼운 다음 수면을 유도하는 주사를 놓아주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라고 했다. 금방 잠이 들었다. 깼더니 끝나 있었다. 나처럼 잠이 안 들어 고생하는 사람도 이렇게 간단하게 재우다니. 병원에 오면 사람 몸은 기계 같다. 정신이나 영혼 따위는 무기력하다.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렸다가 의사를 만났다. 만성위염 증상이 있다고 가볍게 말했다. 약을 지어줄 테니 일주일 정도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그게 전부였다.

'암이 아니면 별일 아닌건가?'   

   

마치고 파티마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냥 보내려니 미안했다.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고마워요. 함께해 줘서”

“만성위염 정도면 그러려니 해야죠. 그럴 정도 나이는 되셨으니.”

“그렇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지겠죠. 오 년 전쯤에 내시경을 했을 때는 아주 깨끗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위벽이 헐었다는 이야기로군요.”

“선생님은 술도 안 드시고 담배도 안 피우시고, 음식도 부드럽고 싱겁게 드시잖아요.”

“요즘 가끔 아내를 돌보던 시절 생각이 납니다.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던 것 같아요. 긴장이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세월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게 이상하죠.”

“그런데 파티마,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든 물어보셔요.”

“우리가 안 지는 꽤 오래되었잖아요.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요즘 들어 비교적 자주 보는 편이죠. 전에는 일 년에 서너 번 봤나 그랬을 거고요.”

“예, 그랬죠.”

“미안한데요, 그때 우리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제가 워낙 무심해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지금과 별 다르지 않았어요.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그림 이야기 뭐 그런 거였어요. 제가 궁금한 걸 여쭤보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없었죠. 저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읽고 나서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했어요.”

“그렇군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미있었나 보네요. 드물게라도 만난 걸 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저로서는 좀 낯선 상황이 계속되어서 궁금해요. 우리 관계는 뭘까? 파티마와 헤어지고 나면 늘 그 생각이 떠올라요. 우린 그냥 친구인가요?”

“예, 그렇죠. 저는 옛날부터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었어요.”

“저 같은 친구라면 어떤......?”

“선생님은 책이나 영화, 그림, 음악에 대해서도 잘 아시잖아요. 통찰력이 깊으시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시기도 하고, 요리 실력도 대단하시고...... 나이가 많으셔서 편하기도 하고요. ^^.”

“아, 그러니까 부담 없는 대화 상대로 아주 적격이다. 이런 뜻이로군요. 필요하면 병원에 동행해 주고. ”

“하하 예, 선생님 애인이 생기면 그때는 그분께 바통을 넘겨드릴게요. 그 전에는 제가 언제나 해 드릴 수 있어요. 다음 주에 한 번 더 있잖아요.”

“그렇군요. 제가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군요. 파티마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야겠어요.”

파티마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느낌이 어떠세요?”

“아, 예. 그렇게 갑자기 도발하시면 아무 느낌이 없어요. 놀라기만 해요. 제가 보기보다 예민하거든요. ^^”

파티마가 손을 놓았다.

“저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싫으셔요?”

“그건 아닙니다. 재미있고 좋아요. 고맙고요.”

파티마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하면 말씀해 주셔요.”

“어떡하게요?”

“그거야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죠. 저도 선생님이 남자로 보이면 말씀드릴게요. 그런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죠. 오랫동안 잘 지낼 건지, 빨리 헤어질 건지.”

“좋은 친구가 되면 오랫동안 잘 지낸다는 건 알겠는데, 연애를 하게 되면 왜 빨리 헤어지게 된다고 생각하셔요?”

“어디에 붙은 불이든 불은 오래지 않아 꺼질 테니까요.”

“비유는 언제나 그럴듯하지만 저는 비유가 실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도 실제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평균적이라는 말은 악랄할 정도로 현실을 왜곡할 때 자주 쓰이잖아요.”

“오, 그래요.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어떤 관계든 좋은 친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가 안 되면 다른 관계는 다 너무 허망해요. 저도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게요. 나이 많은 사람을 친구 삼아 줘서 고마워요.”

“놀리지는 마시고요.”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파티마를 만날 때마다 낯설지만 신선해요.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고마운 마음도 드는 거겠지요. 이런 관계는 처음이거든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까 궁금해요.”

“수면내시경 받으셨으니 좀 쉬셔요. 저도 다른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파티마는 조금 새침해져서 떠났다. 순전히 내 느낌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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