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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현 Sep 15. 2015

'로맨스가 필요해'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날들

 홈쇼핑 MD로 일하는 여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회사에서 촬영했던 드라마다. 한창 TV에 방영 중일 때 친구들이 나에게 정말 그 드라마에서처럼 일하냐고 물어보곤 했다.

 예쁘고 화려한 사람들이 일하는 회사. 신나는 일도 많고, 극단적인 사건사고도 많은 회사. 일하는 게 재밌을 거 같다는 친구들의 말에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도 그런 회사에서(그런 국장님 밑에서) 일해봤음 좋겠다!" (드라마에서 국장 역할은 배우 남궁민이었다)


 한때 나는 왠지 모를 '부러움 병'에 걸렸던 적이 있다. 딱 취업준비를 하던 때였는데, 나랑 관련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좋아 보이고 부러워지는 그런 병이었다. 지나가다가 모르는 사람을 봐도 그가 양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교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 정류장에 서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계기로 나는 드라마에  빠지게 되었다. 드라마를 보는 순간에는 '내가 아닐 수' 있었고, 현실로부터 나 자신을 도피시킬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며 극 중 여주인공의 고난과 시련까지도 부러웠다. 내가 극복해야 할 고비는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여주인공이 감당해야 할 아픔은 로맨틱해 보이기까지 했다. 드라마니까 당연히 좋게 해결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해피앤딩 뒤에 또 어떤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결혼한 뒤에 부부싸움을 했는지, 시어머니에게 시달렸는지는 어떤 동화책에도 언급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좋은 마음으로만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나도 해피앤딩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드라마 말고 휴대폰 게임에 빠지기도 했다. '스머프 빌리지'라는 마을 꾸미기 게임이었는데, 농작물을 가꿔서 돈도 벌고, 돈을 벌면 집도 짖고, 나만의 정원도 꾸밀 수 있었다. 더 부끄러운 얘기를 하자면, 게임을 하는 동안 진심으로 그 마을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른이 다 된 취업준비생이 말이다. 게임 속에서는 돈을 벌기도 쉬웠다. 내 집을 갖기도 쉬웠다. 현실에서 거절당했던 수많은 것들이 그 곳에선 허락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피하고 싶었던 건 현재의 나의 모습이 아니라, 최후의 나의 모습이었던 게 분명하다. 최후에 내가 취업에 실패하게 된다면. 최후에 나의 상황이 나아질게 없게 된다면. 최후에 나의 극본은 해피앤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스물네다섯 살 정도의 취업준비생 여자애가 무슨 최후를 맞이한다고 난리를 쳤는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지금도 누군가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그중엔 나처럼 드라마나 게임으로 현실을 피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만 찾아오지 않는 로맨스를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맨스가 필요해'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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