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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현 Jul 31. 2015

유리멘탈

홈쇼핑 민원고객 대응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담당 MD야? 도대체 상품을 어떻게 선정해서 방송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업체  연락받기 싫다고 했지? 근데 왜 자꾸 연락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살면서 한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이렇게 많이 했던 적이 있을까.

28년째 까칠하게 대하고 있는 엄마한테도,

감정이 식어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한 전 남친에게도,

나의 미숙한 운전실력으로 사고를 당한 앞 차 주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반복적으로 사과를 한 적은 없다.


MD가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입사 3년 만에 처음 해본 일이니 말이다. 민원은 보통 CS팀에서 다루고 있으며, 상담원들이 고객과 통화하여 처리한다. 이번 사건은 고객이 죽어도 담당 엠디와 통화해야 직성이 풀린다며 엠디 통화 요청에서 비롯되었다.


'사과  전화쯤이야..'

죄송하다는 말만 하면 되는 짜여진 각본.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난 멘탈이 센 편이다. 신랑은 내 멘탈이 센 게 아니라 '무(無) 멘탈', 멘탈이 없는 거 아니냐고 놀리기는 하지만, 뭐 멘탈이 없든 멘탈이 세든 웬만한 일 엔 크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다.


내 멘탈을 믿고 대수롭지 않게 다이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oo홈쇼핑 ooo 담당 MD 김예지입니다."

좋다. 나 다운 목소리다. 잘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아직까지 목소리는 침착하다. 다행이다. 그런데 내 눈가는 왜 자꾸 촉촉해지는지. 눈물을 참을 때 나타나는 증상 콧물. 왜 자꾸 코에 습기가 차오르는지. 또 오늘따라 사무실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건지..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도 모르게 통화는 끝이 났다. 나는 너덜너덜해졌고, 혼은 빠져 있었다. 사실 고객이 그렇게 나쁜 소리를 한건 아니었다. 욕을 섞지도 않았다. 고객 입장에서 충분히 화난 이유를 얘기했다. 너무 탈탈 털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기억은 안 나지만 고객은 화를 내면서도 존댓말을 썼던 거 같기도 하다. 다만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에서 소리를 내질렀고, 나는 거기에 끊임없이 죄송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참..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상대방의 말도 말이지만, 내 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송하다'는 말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점점 죄를 진 느낌. 내 스스로를  계속 죄 지은 사람으로 몰아가는 한 마디. '죄송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대단한 일을 우리 상담원들은 매일매일 하고 있다니 정말 존경스러웠다. 내가 살면서 컴플레인한 일들, 서빙하는 직원에게 눈살 한 번 찌푸린 일들. 참 많은 상황이 머리 속을 스치고 갔다.

내 권리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들, 그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도 되는 대우는 결코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런 많은 것들을 느낀 가운데

결론은,


그래도 죄송해요 고객님!! 다 제  잘못입니다. 우리 회사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아 슬프다. 역시 고객님은 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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