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사소한 일 하나로도 분노가 일고,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눈물이 나는.. 어떤 감정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숨 턱까지 꽉 막혀있는 날. 그래서 사소한 일, 사소한 눈빛, 사소한 손길, 사소한 말에도 울컥하고 터져버리는, 그런 한계에 달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미팅을 해치우고, 일에 일이 더해지던 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들을 새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누구라도 나를 이기려 들고, 누구라도 나를 부리려들던 날이었다.
해가 이미 떨어진 저녁이 돼서야 방송 하나를 끝내고 콜택시를 불렀다. 늦은 시간이 아니라 택시비 지원은 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3일 연속 저녁 방송이 있었다) 아기가 잠들기 전에 집에 들어가 딸아이와 3살짜리 애처럼 놀고 싶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협력사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방송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실적에 대한 항의 전화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을, 그 순간만큼은 받아주기가 힘들었다. 방송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방송 시작 전 준비 과정부터 실시간 생방송 중에도, 방송 끝난 뒤 사후 미팅에도 참석하지 않은 협력사가 숫자로 나타난 결과만으로 이렇게 몰아세워도 되는 것인지.. 감정이 폭발했다. 내가 정말로 잘못한 거냐고 따져 물었다. 잘못은 나한테만 있는 거냐고 언성을 높였다. 전화를 끊은 택시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민망하기도 했다. “XX!!!”이라고 욕이라도 지껄이고 싶었지만 한줄기 이성의 끈을 잡고 있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옆에서 놀고 있는 시현이 목소리도 들린다.
“시현아 엄마 언제 오냐고 물어봐”
“우리 딸~ 엄마 이제 10분 안에 가요!”
애는 관심도 없는 듯한데, 우리 부부의 대화는 종종 이렇게 아이를 건너 다닌다.
“시현아 뭐 하고 있어?”
“시현이 책 읽고 있어요~”
애 아빠가 딸내미 말투로 대답한다. 그렇게 우리 딸을 빙의한 서른 중반의 남자와 짧은 몇 마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다중인격자를 연상케 하는 두 통의 통화 내용을 모두 들은 택시 기사님이 한마디 했다.
“애기 엄마가 고생이 많네.”
그리고 내 감정이 또 한 번 폭발했다.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아니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늘 나에게 절실했던 한마디.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한마디를 그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기사님은 어리둥절했고, 내 모습은 욕지거리 내뱉는 것만큼이나 창피한 꼴이긴 했지만,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 사소한 일 하나로도 분노가 일고,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눈물이 나는 그런 날. 아무 말 필요 없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택시가 필요했던 그런 날 말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 안은 그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