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7년 차, 육아 4년 차 첫 해외 출장기
- 비행기 한 좌석이 주는 기쁨
“누가 갈래?”
대한민국 정규 교육과정을 밟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듯, 나 역시 자진해서 손을 드는 일은 거의 없다. 강의시간에 질문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해 보일 정도이다.
그런 나에게도 가장 먼저 손을 들게 한 질문이 있었으니.. 바로 입사 7년 만에 찾아온, 출장이란 기회가 걸린 질문이었다. 팀장님은 ‘업무 할 때도 이런 적극성을 보여봐라’라는 한심한 눈빛을 담아(?) 나를 지명했고 그렇게 나는 생에 첫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는 곧 MD로서 견문을 넓히는 기회이자, 더 깊은 이면에는 1. 육아로부터의 해방 2. 육아로부터의 독립 3. (역시나) 육아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얘는 출장이 좋은 게 아니라, 집에 안 들어가니까 좋은 거야”
좋아라 하는 나를 보며 상무님이 말씀하셨다. 싱글이고 애가 없을 땐 그렇게도 싫던 회식이었지만, 애를 키우다 보니 이렇게 공식적으로 술 마시는 기회가 또 어디 있으랴. 공식적인 술자리도 이리 좋은데, 하물며 공식적인 출국이라니!
출장과 여행은 엄연히 다르다는 경험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목적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무지 폼나 보였다. 게다가 12시간의 비행은 누군가에겐 고된 여정이겠지만, 나에게는 꿈에 그리던 시간이다. 어디 우리 엄마들이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 수나 있는 존재들인가? 그분의 몸뚱이도 챙겨 드리고, 내 몸뚱이도 그분을 위해 쓸 수밖에 없는 반노예와 같은 일상에서, 내 맘대로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눈도 붙일 수 있는 그 좁은 한 좌석이야말로 ‘안식처’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 처음 만난 여자가 제일 예쁘다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미국 시카고다. 거기서 열리는 주방가전 박람회를 참관할 예정이다. MD 그리고 PD들에겐 종종 기회가 주어지는 상품 및 시장조사 목적의 출장이다. 나아가 상품 소싱으로 이어진다면 최고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팀을 옮겨 생활/주방가전 부류의 렌탈 상품을 맡은지도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보통 TV MD들이 2~3개의 담당 상품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 우리 팀의 경우 각 MD당 7~8개 정도의 상품을 맡고 있다. 상품 운영은 MD의 주 업무이지만, MD라는 직무의 가장 본연적인 정의는 Merchandiser, 즉 “상품화 계획 또는 상품기획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박람회 참관은 그 정의에 가장 부합한 행사이며, 다양한 상품을 접하고 그것을 상품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MD들은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열리는 여러 박람회/전시회에 자주 다녀온다.
남자들 눈에 가장 예쁜 여자는 ‘처음 만난 여자’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새로운 걸 만난다는 건 늘 궁금하고 설렌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처음 보는 상품들을 만난다니 설렘 그 자체이다. 하지만 결국 회사 돈으로 가는 여정에는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감 말이다.
“전사 토크쇼 안 하는 게 어디야. 그 시절엔 박람회 출장 아무도 안 가고 싶어 했지.”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옛이야기로 나를 위로했다.
- 영어는 대충 눈치로
나름 회화실력은 중상급이라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파티 잉글리시’에 불과했다. 학생 신분으로 외국에 있을 때에는 파티에서 가장 적극적인 대화가 오갔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드렁큰 잉글리시’(음주 영어) 였기에 더 용감한 째로 중상급 영어를 구사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어를 못하는 건 둘째 치고, 내 업무에 관한 영어를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비즈니스 영어강의라도 신청해서 공부해 볼 걸’
후회는 늘 행동보다 먼저 자리 잡곤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라고 하지만, 이미 뇌리에 자리 잡은 후회는 몸이 행동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의 뻔뻔함으로, 박람회 여러 부스를 다니며 이것저것 고객의 입장으로 제품에 궁금한 것들을 많이 물어봤다.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적인 내용이 나오면 머릿속은 이미 하얘졌으나,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대충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uh-huh’라는 마법의 한마디로 말이다.
*uh-huh : 감탄사
으응, 응(남의 말을 이해했거나 그것에 동의할 때·말을 계속하라는 뜻으로·‘그렇다’는 뜻의 대답으로 내는 소리)
5박 6일의 시카고 출장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쌓여있는 업무, 밀려있는 미팅이 나를 기다리지만 마음 한구석은 넉넉하고 기분 좋다. 이제 남은 건 출장 보고서와 발표. 모아 온 자료로 타이핑을 시작한다.
‘또 보내주세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넣어 잘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