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퇴근 후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중에 내 앞에 걸어가던 할아버지가 뭔가 이상했다. 걸음이 불편하신가 생각하던 찰나, 할아버지의 팔 뒤꿈치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지? 넘어지셨나? 누구한테 맞은 건 아닌가? 걱정도 됐지만 차마 쫓아가서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걷는 방향이 같아 나는 그렇게 한참을 할아버지 뒤를 따라왔다.
말을 걸까, 말까 스스로의 용기와 시름을 하다가, 일단은 할아버지를 자연스럽게 앞질러가서 얼굴부터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을 하려다 도리어 큰 일 날수도 있으니, 우선은 인상부터 확인하고 도우려는 신중함(사실은 소심함)이 앞섰다.
살짝 빠른 걸음으로 할아버지를 제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척 주위를 돌아보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기력한 표정의 나이 든 노인이었다. 마침 할아버지도 1500-2번 버스를 타는지 내 뒤에 줄을 섰다.
"할아버지, 팔에서 피나요."
할아버지는 눈만 꿈뻑꿈뻑, 아무 말없이 자신의 팔꿈치를 확인했다.
"어휴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
"넘어졌어"
"넘어지셨다고요? 어디서요?"
"산에서 내려오다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진 할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아프고,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여차해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걸어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중풍으로 잘 걷지 못했던 우리 외할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지해서 홀로 산책을 나갔던 날도 같이 떠올랐다. 빠르게 줄어드는 신호등의 파란 칸 때문에 마음이 급했었다고. 그래서 할아버지 나름의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다가 넘어지고 말았고, 그렇게 앞니 하나가 빠져서 우릴 보고 씨익 웃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 일어나서 집으로 오셨다는 얘길 듣고, 어떻게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지 괜히 그 상황에 화가 나고, 할아버지를 다그쳤던 신호등이 밉기만 했다.
"저랑 같이 약국에 가요."
버스정류장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변에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피는 많이 났지만 굳어 있는 상태였고,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말했다. 마침 지갑 속에 항상 갖고 다니던 밴드가 있어 붙여드린다고 조심스레 얘기했다. 싫지는 않으신지 팔을 내밀었다. 그렇게 내 역할을 다했고, 버스에 올라탔다.
사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은 처음보단 훨씬 가벼웠다. 할아버지는 집에 도착해 가족들에게 넘어진 얘기를 할 것이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얘기했을 때처럼 그분의 가족들도 마음이 많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상처의 일부라도 가려진 그 밴드를 본다면, 이 상황을 노인 혼자 감당한 건 아니구나라고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외상에 비하면 콩알만 한 친절일 뿐이지만,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줬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 역시 우리 외할아버지가 넘어졌을 때 누군가 부축이라도 해줬더라면 마냥 신호등을 탓하고 미워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따뜻한 용기.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용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용기는 참 어렵다.
그럼에도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렵지 않게. '괜찮으세요?'라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