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메일을 드리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보냅니다.
제 뜻과는 달리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 드리는 것 같아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한 달 후에 K 대학 교수로 발령이 날 것 같습니다. 성에 차는 자리는 아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가려고 합니다.
(중략)
교수님께 저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다시는 메일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순수한 고백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무례하게 메일을 보내드려 다시 한번 송구스럽습니다. 고백을 받아주시건 받아주시지 않건 고백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메일이 불편하셨다면 답신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절의 답신도 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볼 용기가 없어서요.
살다 보면 또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겠죠.
그럼 항상 행복하십시오.‘
수정 : “야, 저게 뭐야!!! 캬캬캬캬캬. 초등학생 고백이야 뭐야 박력이라도 있던가 답신을 볼 용기가 없다는 건 뭐야. 크크크크”
나 : “아 배 아파, 아놔. 눈물난다 눈물나. 이 나이에 순수한 고백이라... 에휴 애들 대학 보낼 나이 아니니... 크크크”
차 교수 : “야야, 이것들아 나는 무서워 죽겠다고... 벌써 몇 년째 저렇게 잊을 만하면 메일이 온다고... 지난번엔 학교 연구실로 먹을 것도 보냈어. 커피 광고 사진 보내면서 여자 모델이 날 닮았다고 하질 않나. 이상한 춤 영상을 보내질 않나. 나 무서워 진짜. 저러다 발작하는 거 아냐?”
나 : “야, 발작할 위인도 안된다 저건. 근데 외모가 그렇게 아니냐. 저 정도로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좀 받아주면 안 되니? 그래도 남자가 아주 없는 것보단 낫잖냐.”
차 교수 : “외모도 별로지만 싫다는 대도 메일 계속 보내는 게 정상인 같지가 않아. 챗지피티한테 물어봤는데 저런 애들 꼭 발작 한다구 증거 모아놓구 스토커 신고하래. 학교 보안관한테도 미리 얘기해 놓구.”
수정 : “진짜 코메디다. 모쏠인 거 다 티 난다 다 티나. 무서워하지 말고 똑 부러지게 앞으로 메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보내봐. 교수씩이나 되는데 알아들어야지.”
차 교수 : “응. 나이 들어서 이런 인간들이나 꼬이고 정말 우울하다. 아흑.”
여고 동창 세 명이 모여있는 단톡방은 오전 일찍부터 차 교수의 연애편지로 뜨거웠다. 백옥 같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 가녀린 체구의 차 교수는 또래 남자 교수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다. 나이는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이지만 누가 봐도 대학원생 같은 풋풋하고 단아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 예쁜 얼굴에서 입만 열면 이 년, 저 년 욕이 나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수 있지만 정말 마음만은 누구보다 곱고 천사 같은 친구이다. 여즉 결혼을 안 하고 있어 우리 셋은 만나기만 하면 차 교수가 과연 이 나이에 결혼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이야기가 귀결된다.
“이 년아 넌 가슴을 좀 파고 다녀야지 맨날 목폴라만 입고 다니면 누가 봐도 꼰대 교수지 말이야. 깊이 파인 브이넥 니트 좀 하나 사라, 제발.”
“그러니깐 말이야. 이 나이에 애껴서 모하냐. 클럽이라도 가서 흔들어 재껴야 건수가 생기지. 맨날 연구실에만 처박혀있으면 남자가 굴러들어 오냐. 니가 지금 애낄때야!!! 이 나이엔 처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이 년아. 답답하네 정말.”
결혼한 지 근 20년이 다 되어가는 수정과 나는 차 교수를 구박하는 재미에 한껏 걸쭉한 아줌마 목소리로 결혼 안 할 거면 연애라도 좀 하라 채근하지만. 결혼할 남자 아니면 연애도 하고 싶지 않다는 녀석이다. 그러다 가끔 저런 구애를 하는 남자가 나타나면 유부녀 둘은 재미있어서 하루 종일 놀려대며 킬킬대는 것이다.
남의 연애는 언제 들어도 팝콘 각이지. 그래서 ‘나는 솔로’ 같은 프로가 인기 아니겠어? 연애까지 갈 것도 없이 연애를 하고픈 남자 교수의 저 순수하고도 상사병이 날 것 같은 편지에 오늘도 우리는 엔돌핀이 샘솟는다.
우리 셋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차 교수와 수정이는 각각 1학기 반장, 2학기 반장이었다. 셋이 함께 야자 하는 날은 꼭 우리 셋 중 누군가 먼저 어깨를 툭 치며 따라 나오라는 싸인을 보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미리 봐둔 비어있는 교실로 몰래 기어들어가 서로의 입만 보이는 그 깜깜한 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고 끊임없이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들한테 들킬 까봐 모기 한 만 목소리로 조심조심 놀았던 기억이 선하다. 하지만 가끔 들키더라도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는지 크게 혼난 적은 없었다.
그럼 야자가 끝나고 간 동네 독서실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했느냐. 우린 누구 한 명이 배고프다 하면 다 같이 1층 편의점으로 내려가 컵라면을 끓여 먹는 의리 있는 친구였다. 서로 화장실 망을 봐줄 정도로 붙어 다녔으니 그 고달픈 고등학교 3학년동안 다져진 우정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고3 내내 연애를 했던 나의 연애 스토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기도 해서, 나도 까먹은 나의 연애 에피소드를 듣기 위해서라도 종종 만나는 친구들이다.
차 교수가 서울의 유명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다. 평범하게 결혼해서 애기 낳고 살림하면서는 도저히 못 했을 공부이다. 그 오랜 시간 미국에서 얼마나 외롭게 공부했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앞에서야 농담으로 미국 남자랑 찐한 연애도 한 번 안 했냐고 놀려먹지만, 나는 정말 그녀를 마음으로 존경한다.
오전 내내 불이 났던 카톡방에
“야, 아무 남자나 재지 말고 얼른 시집가서 우리 좀 찾지 말어라. 아침부터 아주 귀찮아 죽겠네.”
라고 쏘아붙이고 차 교수의 카카오 프로필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자식, 참 지 혼자 안 늙어 재수 없게.’
K 대학 교수의 절절한 연애편지 때문이 아니더라도,든든하게 교수 자리 지키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내 친구에 비하면 그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내 성에 찰 것 같지가 않다. 차은우가 와도 안 되지 암. 너무 아까워서 시집보내기는 영 틀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