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by 바다하나

“503호죠? 승강기 교체 찬반 투표 오늘까지인데 하셨어요?”


표정 없는 얼굴로 아파트상가를 걷고 있는데 모르는 얼굴의 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세우며 말을 건다.


‘하... 승강기 교체 따위가 뭐라고 귀찮게 찬반투표까지... 낡았으면 그냥 하면 될 것이지.’


속마음이 들키지 않게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인다.


“아 네~ 오늘 꼭 할게요.”


나는 요즘 표정이 없다. 표정이 없다는 건 거울을 봐서 아는 것이 아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가끔 웃을 일이 있어도 혼자 있을 때는 웃지 않는다. 그냥 피식하는 정도.


집에 오자마자 반찬을 만들기 시작한다. 콩나물, 시금치, 된장찌개. 늘 하던 것들이다. 오늘은 생선을 구울까, 불고기를 구울까를 잠시 고민한다. 뭘 내놓든 군소리 없이 먹는 남편이라 반찬을 고민할 때 길게 하지 않는다. 차라리 군소리를 했으면, 오늘은 이게 먹고 싶다 딱 부러지게 요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면 조금은 만드는 게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 나에게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 건 의미 없이 지나가는 일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알아서 매일 해야 하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어떻게 재미 따위를 느낄 수 있을까. 왜 영화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죄수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옷을 꿰매거나 마당을 쓰는 것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늘따라 맛있게 무쳐진 시금치가 너무 짜증이 난다.


“야, 너 왜 맛있고 난리야. 남편은 맛있다는 말도 없이 먹기나 할 텐데.”


이 시금치는 너무 맛있으니깐 오늘 남편한테는 내어 주지 말까 생각한다. 회사에서 맨날 맛있는 점심을 사 먹는데 이런 시금치 따위가 아무리 맛있게 무쳐진들 감동이겠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얄밉단 말이야.


그다음은 된장찌개. 아이들은 된장찌개를 싫어한다. 즉, 남편을 위한 메뉴라는 이야기다. 아우 더 짜증이 밀려온다. 애들은 먹지도 않는 된장찌개를 끓이겠다고 재료를 덜컥 사온 나도 참 답이 없다. 순간 감자만 넣고 감잣국으로 바꿔버릴껄 후회가 된다.


“에이! 됐어. 나중에 할래.”


소파에 벌렁 누워버린다. 앞치마를 두른 채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쇼츠를 몇 개 보다 보니 전부 40-50대 중년 여성을 위한 피부과 시술 영상들뿐이다. 오늘따라 왜 내 얼굴에 관심을 갖는 거니 이 알고리즘 녀석아.

어제 엄마들 모임에서 누구 엄마는 울쎄라를 했네, 누구 엄마는 티타늄을 했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강남의 피부과 몇 개를 검색해서 저장해 놨던 게 생각났다.

나도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에 뭐라도 하나 해야지 하고 저장해 놓은 건데 벌써 이렇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다니... 알고리즘 따위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게 영 짜증이 나고 성가시게 느껴져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또다시 내 얼굴은 무표정이 되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초점 없는 눈빛에 입꼬리는 살짝 내려갔고 그 옆에는 팔자주름이 자리하고 있으며 미간에 주름이 슬쩍 깊게 잡혀있다. 거북목으로 머리는 어깨에서 앞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더 볼썽사납다.

누군가가 나를 몰래 찍어서 보여준다면 “에구머니나!” 하고 놀라자 빠질 게 분명하다. 내가 유명 연예인이 아니라 그 누구도 나를 몰래 찍을 일이 없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본다. 내가 생각하고도 그게 좀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났다.


오늘 하루 중 가장 크게 웃은 웃음이다.


시선이 창문으로 옮겨진다. 여름이 지나고 해가 짧아지고 있다. 남편이 올 시간이 다가오니 벌써 어둑해지는 것이 가을이 오는구나 싶다.


‘아... 저 산 너머로 지는 해가 꼭 내 모습 같구나...’ 하고 청승을 떨어보려 하고 있는데.


“카톡!”


남편: 모 해?

나: 모 하긴 밥하고 기다리고 있지.

남편: 나 30분 후 도착하는데 나올래? 오늘 밖에서 치맥 하자.

나: 모래. 반찬 다해놨는데.


속으로 된장찌개를 안 끓이길 다행이다 생각하며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다. 치킨집은 우리 집 바로 코 앞 상가이지만 새로 산 버건디 컬러의 가을 니트를 걸쳐본다.

코 앞에 상가라도 이렇게 가을바람이 불 때는 가게 앞에 테이블을 깔아놔서 나름 분위기가 좋단 말이야. 혹시 알아 동네 엄마라도 마주칠지.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단정히 빗고 립스틱도 발라본다.

후라이드 치킨은 살찔 테니깐 전기구이를 시켜야지. 거기 전기구이가 꽤 맛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더라. 남편은 그 집 전기구이를 먹어봤으려나.

맥주는 딱 두 잔까지만 마실 거야. 이따가 애들 야식도 줘야 하는데... 아 후라이드 하나 포장해 와서 애들 야식으로 주면 되겠다. 우리 큰 애가 후라이드를 좋아하던가, 양념을 좋아하던가. 아니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치맥...


도착했다는 남편의 카톡에 후다닥 신발을 신고 현관에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본다.


반짝이는 눈빛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내 얼굴이 보인다.


‘풉. 웃고 있네. 내가.’




수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현모양처가 꿈이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