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보다 심한 병
미영은 몇 분째 현관문 도어록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몸이 기억하여 매일 누르던 도어록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 6자리 수 인 것까지는 알겠고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로 설정했었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이 숫자를 다 누르고 나서 '*'이었는가 '#'이었는가. 이미 ‘*’도 눌러보고 ‘#’도 눌러봤는데 이 망할 놈의 문이 열릴 생각을 안 한다.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비밀 번호가 틀렸습니다.”
“에라이!!!”
욕이라도 나올 판이다. 가득 찬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머리를 쥐어짠다.
‘혹시 그 6자리 수 앞에 뭔가 더 누르는 게 있었나?’
머리에 뿌옇게 안개가 깔리는 느낌이 들면서 더 이상 아무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마흔일곱 평생 이런 적은 처음이라 미영의 가슴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설마 벌써 이 나이에 치매 초기증상은 아니겠지, 등 뒤로 식은땀도 나고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진다.
“하아.....”
이제 한 번만 더 비밀번호를 틀렸다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일단 한 발짝 물러나 기로하고 터덜터덜 몸을 돌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옆에서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짜증이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이다.
오늘따라 두 손 가득 무겁게 장을 본 데다가 당장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 소고기도 있단 말이다. 하필 오늘 소고기를 세일하길래 많이 사버렸는데 저거 상해버리면 어떡하냐고. 학교에 간 아들 정훈이가 돌아올 시간도 곧이다. 오자마자 밥 먹여 학원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만사에 짜증이 치민다.
저 멀찌감치 경비아저씨가 다가온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마... 나 오늘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아저씨, 저 오늘 날카로워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가줘요. 오늘은 아저씨랑 인사도 귀찮아.’
오늘따라 비염이 심한 경비아저씨의 킁킁거리는 소리가 더 거슬리는 것 같다.
“아, 저기, 킁킁. 1008 호시죠? 사장님 앞으로 등기 온 것이 있는데 이따가 들어가시는 길에 받아 가세요. 컥, 킁킁.”
“어머, 네, 아저씨 감사합니다.”
‘하... 김미영, 티 안 나게 자알 했어.’
미영은 위기를 자연스럽게 넘긴 자신을 칭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비염 있는 아저씨에게 자기 집 비밀번호를 기억 못 해서 멘붕온 여자라는 걸 들킬 순 없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상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너무 목이 타서 당장이라도 목구멍이 쩍 하고 붙어버릴 것만 같다. 냉장고에서 아무 음료나 꺼내 계산을 하고 선 채로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군.'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누른 비밀번호는 틀린 게 없어. 그게 정말 무서운 포인트야. 비밀번호야 지금 남편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가 않는다. 그 인간 성격에 두고두고 놀려먹을걸. 시댁 가서도 신나서 얘기하겠지.
“엄마, 며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정훈엄마가 우리 집 현관문 도어록 비밀번호를 잊어버려가지고 집에 못 들어갔잖아요. 크크큭! 몇 분을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저한테 전화해서 겨우 들어갔어요. 이제 정훈엄마도 나이 들어 저렇게 깜빡깜빡한다니깐요. 엄마.”
그 종이, 아니 티슈보다 가벼운 입으로 본인 엄마한테 쉬지 않고 나불대는 모습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갑자기 아랫배가 꼬이는 느낌이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정훈이가 돌아올 시간인 데다가 잔뜩 사놓은 소고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안되면 남편한테라도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작정으로 성큼성큼 집을 향하기 시작했다.
힘찬 발걸음으로 시작했지만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점점 발걸음에서 자신감이 사라진다.
'근데 진짜 나 치매 초기면 어떡하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전에도 마트에 차키를 두고 온 게 생각난다. 아들이 부탁했던 문제집도 깜빡했었고 맛집이나 연예인 이름 까먹는 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인데 왜 여태 치매일 수도 있단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 그냥 지금 남편한테 전화하고 깔끔하게 집에 들어갈까.
드디어 집 앞에 도착.
심장이 덜렁덜렁 지 맘대로 뛰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집에 못 들어가면 주저앉아 울어버릴 것 같아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린다.
미영은 현관문 앞에 아예 무릎을 꿇고 앉아 숫자 하나하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심정으로 꾹꾹 눌러본다.
“삐, 삐, 삐, 삐, 삐, 삐, 삑, 삐~”
“비밀 번호가 틀렸습니다.”
미영은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치매가 틀림없다. 늙는다는 건 이렇게 슬픈 거다. 매일 당연히 하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창피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
젊은 시절에는 자꾸 깜빡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었지. 왜 간단한 것들을 두 번 세 번 확인하는지 답답했었는데.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그렇게 나의 뇌는 늙어버렸나 보다. 누구에게나 이런 날은 예고도 없이 오는 거다. 그러니 젊은것 들아. 방심하지 말아라. 너희도 곧 이야 곧!
“.......”
듣고 있는 젊은것들도 없는데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미영은 자신이 한심했다.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일생일대의 위기다.
긍정 회로를 돌려보자. 긍정 회로를. 미영! 심호흡을 해!
이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해.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잖아.
‘그래, 처음부터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남편에게 전화하면 되는 일이었어. 갑자기 생각이 안 나고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일이 뭘 대수라고. 치매는 아닐 거야. 남편에게 번호를 듣고 나면 아 맞다! 그거였지! 하고 웃어버리게 될 거야. 잊어버렸던 걸 들었을 때 아하! 하고 기억나면 치매는 아니랬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며 미영은 목을 흠흠 다듬었다.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목소리여야만 한다. 남편은 미영이 30분째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 걸 절대 몰라야 한다.
“여보세요.”
“어, 여보~ 회사야?”
“어, 회사지. 왜?”
“아니~ 나 지금 막 장 보고 왔는데 갑자기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네? 뭐였드라~ 우리 결혼기념일 맞지?”
“아..... 그거 내가 어제 도어록 배터리 교체하면서 찝찝해서 바꿨어. 결혼기념일 끝에 숫자 1을 추가.......”
“뭐?????? 야!!!! 이 인간아!!! 그걸 왜 이제 말해????????”
하여간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놓고 나에게 말하는 걸 깜빡한 남편이란 놈은 치매보다 더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그것도 모르고 30분이나 생쇼를 한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이 나이에 치매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미영은 집으로 유유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