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절정 - 사파리
한가위 보름달을 야생의 자연 상태에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배낭 하나 매고 나서는 발걸음은 늘 가볍다. 이링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보다보다’라 불리는 오토바이 택시를 탔다. 투타말랭가행 낡은 대형 버스가 기다린다. 행선지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은 차를 운전사의 말만 믿고 탔다가는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여러 사람에게 재차 확인을 하고 난 후에야 차에 오른다.
오후 여덟시에 출발한단다. ‘지금이 오전 열한시인데...’하다가, 탄자니아 시간에 생각이 미친다. 이곳은 그들만이 사용하는 로컬 시간대가 따로 존재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시간과 꼭 여섯 시간 차이가 난다. 계산을 해보니 오후 두시를 의미했다. 세 시간, 기다리는 데는 이제 나도 이력이 난 터라, 제 시간에 출발해 주기만 바랄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꼭 한 시간을 더 채우고 차는 움직인다. 시동을 거는 데 엔진 소리가 불안하다. 옆 좌석에 앉은 학생을 걱정스레 쳐다본다. 괜찮단다.
두 시간이 걸린다는 버스는 정확히 네 시간을 채우고 투타말랭가에 도착했다. 두 시간 거리를 이동하는데 꼭 하루가 걸렸다. 이곳은 마음을 넉넉히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땅이다.
바오밥 나무와 기린의 모습
루아하 국립공원의 첫인상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쯤으로 서술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 기대를 배반하기 마련이다. 낯익은 풍경에 실망하려는 순간 제법 커다란 물체가 후다다닥 길을 가로질러 잡목숲 속으로 사라진다. 초입부터 송아지만한 짐승을 만났다면 기대해도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잠시 스친다.
사파리 도중 가장 많이 만난 동물이 임팔라, 코끼리, 기린 순이었는데, 임팔라는 아담하고 날렵한 몸매에 산머루 같은 눈망울이 선하고 앙증맞지만, 존재감 없이 얌전하기만 해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학창시절 동창처럼 싱겁다.
기린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몸매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법하다. 나뭇잎을 뜯어 먹는 품새마저 잘 자란 양갓집 규수마냥 기품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꿈뻑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껑충껑충 뛰어 달아나는데, 춘향이가 향단이로 변한 양상이다.
곳곳에 밑동이 벗겨진 바오밥 나무들이 있었는데, 나무속의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 코끼리가 한 거라고 했다.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들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그들의 소행이란다. 이쯤 되면 초원의 무법자다. 코끼리하면 내게는 타잔 영화 속의 정의의 사도로 기억되었었는데 말이다. 타잔이 곤경에 처해 ‘아~~~~~아아’하고 손나발을 불면, 어느새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악당들을 물리치곤 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라고 있는,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왼쪽 발로 땅바닥을 툭툭 차서 풀을 뽑아 놓고는 긴 코로 살짝 집어 올리더니, 마치 키로 까불듯이 몇 번 흔들어 흙을 털어내고 입으로 가져간다. 무리들과 조금 떨어져 걷고 있는 코끼리 세 마리가 보였는데, 마치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소풍가는 가족같이 정겹다.
아름답기로 치면 기린과 쌍벽을 이룬다고 생각한 얼룩말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의외로 백 미터 미남 미녀들이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매, 두툼한 목살이 둔해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사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는데, 사자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가이드가 차를 돌린다. 이미 몇 대의 차량이 서 있다. 암사자 몇 마리가 그늘에 앉아 있다. 수놈은 보이질 않는다. 맹수의 본능을 숨기고 있는 그녀들은 그냥 게으른 사냥개처럼 보일 뿐이다. 그 외에도 원숭이, 하마, 악어, 이름 모를 새들을 보았다.
이링가로 돌아가려고 나오는 길에 입장료를 치르며 만났던 공원관리가, 휴일을 맞아 때마침 이링가에 있는 본가로 돌아간다며,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국립공원에서 이링가까지는 비포장도로였는데 곧 포장을 할 거라고 했다. 이미 설계도 끝나고 착수만 하면 된단다. 밀렵꾼은 없냐는 나의 질문에 예전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단다.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잘 관리하고 있는 탓이란다.
인상 깊었던 것은 공원 입장료를 카드로만 받고 있었는데, 현직 대통령 마구풀리가 집권하며 비리를 막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했다. 탄자니아는 없는 게 없는 풍요로운 땅을 가졌지만 유능한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하던 나의 동료, 로엘의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내내 꽉 찬 ‘슈퍼 문’이 나를 호위해 주었다.
부시에서 동물들을 많이 만났지만, 오래 기억되는 건 그래도 사람이다. 정반대 방향의 차를 타라던 무책임한 차장들, 가는 내내 말동무가 되어주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자신이 로얄 패밀리라고 허풍을 떨던 가이드, 환율로 나를 바가지 씌우던 사내, 예쁘고 영민해 보이던 친절한 호텔 프론트 아가씨... 그들과 웃고, 수다 떨고, 다투기도 하면서 탄자니아에 한 발 더 나가선 듯하다.
2016.09.25.
탄자니아에서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