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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그림 Oct 17. 2022

녹도문과 명도전

'명도전'이 아닌 '삼신문전(三神紋錢)'으로 불러야 한다

왜 사슴 녹(鹿) 자가 들어가 있는 녹도문(鹿圖文)인가?

녹도문에 화서, 용서, 우서 등에 안 보이는 ‘그림 도(圖)’가 보이는 것에 주목하자.

그러면 ‘鹿’은 이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사슴뿔로 그린 글자’가 녹도문인 것이다.


녹도문이 사용되던 수천 년 전에는 종이가 없었다.

붓도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려면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에 뾰족한 도구로 눌러 그려서 써야 했을 것이다.

즉, 나무판은 석기 시대에는 귀한 물건이었고, 대나무 죽간은 그림을 그리기에 너무 좁았다.

이 뾰족한 도구가 바로 사슴뿔이었던 것이었다.

신성한 사슴 가죽에 녹도문을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단 사슴뿔로 추정해 본다.


왜냐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명도전이다.

명도전은 단군조선의 화폐인 것으로 성삼제 계명대 교수가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상세히 밝혔고, 박선희 교수 등의 논문으로 입증이 되었다.

아래는 명도전의 사진이다.


닳기 전인 명도전 vs 닳아진 명도전


단군조선 지역에서 주로 발굴되는 명도전은 한자 ‘明’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있다고 해서 명도전으로 불리고 있다.


잠시 이 ‘明’ 글자에 관해서 설명하면, 필자는 이 글자를 ‘신 神’이라는 글자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단군조선 화폐인데 난데없이 한자 明을 새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래로 화폐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넣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명이나 신을 넣었을 것이다.

이 중 필자는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가 아래의 산동 지역 대문구문화에서 발굴된 팽이형 토기에 새겨진 문양이다. 


대문구문화 출토 – 삼신 문양 토기


신용하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이 저 문양을 단군조선의 수도인 ‘아사달’ 문양으로 보시는 것 같다.

필자는 대문구문화가 있는 산동 반도 지역이 단군조선의 아사달도 아니며, 설령 아사달이라고 해도 굳이 토기에 수도 이름을 새기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현재 남아있는 고려 청자는 대부분 무덤에서 발굴한 것들인데 이 고려 청자에 개경(開京) 또는 송도(松都)라고 새겨진 고려 청자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고려(高麗)란 국명이 새겨진 고려 청자도 없는 것이다.


저 문양은 ‘신’이어야 합리적이다.


앞서 명도전의 ‘明’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


명도전의 ‘明’ 부분


토기 문양과 명도전 문양이 동일하게 ‘신’을 의미한다고 가정하고 비교해 보면 동일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바로 ‘동그라미’이다.


그리고 비슷한 부분도 발견되었다.

바로 ‘반달’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토기 문양에서는 ‘산’을 그려놓은 것 같은 문양이고, 명도전 문양에서는 ‘둥그런 사선’ 문양이다.


이 세 부분이 서로 대응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이 ‘신’이라는 글자라면, 그것은 ‘삼신 三神’일 수밖에 없다.

즉, 이 문양은 ‘환단한’ 곧 ‘천지인’의 삼신 문양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동그라미가 사람을 뜻하는 ‘한 韓’이고 반달이 하늘을 뜻하는 ‘환 桓’이고 산과 사선이 땅을 뜻하는 ‘단 檀’이다.

화폐에 국명을 새겨넣는 민족은 국가를 중시하는 민족이고, 신을 새겨넣는 민족은 신을 중시하는 민족이라면 한민족은 신을 모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민족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단군조선 강역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삼신문전)은 무언가를 긁어서 새길 수 있게 뾰족한 칼 모양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어서 끝이 닳은 명도전도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녹도문을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에 새기기 위한 도구로 명도전을 사용한 증거이다.

그리고 청동으로 된 명도전이 나오기 전인 신석기 시대에는 뾰족한 사슴뿔이 그 역할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나아가서 이러한 칼 모양의 화폐는 중국에서도 전국시대 제·연·중산·선우국이 있던 지역에서만 출토된다는 특징이 있다.

녹도문을 쓸 때 필요한 도구인 칼 모양의 화폐가 출토된다는 것은 이 지역이 사실 단군조선의 강역(구체적으로는 번조선)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썩기 쉬운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에 녹도문을 썼고 그 사용된 시기가 한자가 나온 BCE 1600년 이전 시기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는 원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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