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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그림 Oct 18. 2022

조선 왕조 수서령의 진실과 식민사학

-수서령으로 모든 고대사책이 없어졌다는 새빨간 거짓말

조선 왕조 수서령은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천문·음양·지리 등 서적이다.

이들 서적은 이미 태종 때 서운관에 있던 것들을 꺼내어 불태워 버린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장례 제도 등을 의논하면서 이조 판서 박식이 “음양가에서 자기들이 보유한 장서를 가지고 3년 상도 지내고 2년 상도 지내는 등 이론이 봉기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고 있으므로 법제를 통일하기 위하여 민간의 이러한 장서들을 모조리 없애고 쓰지 말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미혹을 막으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조 판서 변계량이 “서운관에 있는 괴서(怪書)는 모조리 불살라 버릴 수 있지만, 사사로이 간직한 괴서를 어찌 다 불살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세우게 되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서운관에 있던 관련된 서적들을 일차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들은 세조·예종·성종 때에 수서령이 내려진 것이다.


다음 고조선과 관련된 서적이다.

고조선과 관련된 서적이 수서령의 대상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 태조 주원장은 요동 정벌군을 위화도에서 회군시킨 친명 정책을 추구하는 조선이지만,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고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화가 난 정도전은 군제를 정비하고 군사를 모아서 진법을 훈련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나섰다.

그러자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어 까불지 말라면서,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말고 동이의 임금 노릇이나 잘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던 중 1396년 새해 축하 사절로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다시 억류되었다.

이들 사신이 갈 때 명 태조 주원장에게 새해 인사하는 표전문을 갖고 갔는데, 표전문의 문구를 트집 잡아 작성자를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것이었다.

표전문에서 은나라를 패망시킨 주무왕을 인용한 것이 무례하기 짝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이에 조선은 표전문을 작성한 김약항을 명으로 보냈는데, 주원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표전문의 교정자도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주원장의 주목적은 요동 정벌의 의지를 보유한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총·노인도·권근만 추가로 압송하고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끝내 보내지 않았다.

이들 중 김약항, 정총, 노인도는 끝내 죽임을 당하고 권근만 살아 돌아오게 되는데 사실 권근은 정도전의 오른팔이어서 이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후로 명 태조 주원장은 기분이 좋아져서 더는 조선에 행패를 부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사연을 알아보면 이렇다.

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원장을 만나게 되는데, 주원장이 즉석에서 내어준 시제를 받고 그 운에 따라 24수의 시를 지었다.

이것이 ‘응제시’인데, 권근의 응제시 24수를 받아보고 크게 만족한 주원장은 기념으로 3수의 어제시를 지어 권근에게 하사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권근은 크게 환대받고 영광을 기리는 의미에서 응제시 24수와 어제시 3수가 국가에 의해 간행된다. 

이후 권근의 손자인 권람이 이 27수에 주석을 붙여 1462년(세조 8년)에 편찬한 것이 앞서 언급했던 《응제시주》이다.


《응제시주》(보물 제1090호, 1991)


이 중 9번째 시로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가 들어있는데 그 내용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응제시주》

『옛날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환웅이라 하였다. 인간 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분이 환웅천왕이다. 환은 혹은 단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묘향산이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명·병·형벌·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 

단군은 하나라 우임금을 거쳐 상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에 기자가 와서 봉 받았다.』


권근은 주원장 행패의 원인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는 등 조선이 요동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있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건국된 지 천여 년 만에 망했고, 기자가 조선에 와서 조선 후로 명받고 조선을 다스렸고, 조선의 영역에는 요동이 들어가지 않고 한반도 안에만 있었다”라는 시를 통해 조선은 요동에 연고가 없으므로 연고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밝힌 것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중국에 뒤지며 심지어 중국인인 기자가 봉 받아서 다스린 제후국이라는 태도를 밝힌 것이었다.


이것으로 조선과 명나라 간의 팽배했던 긴장 관계는 해소되고 조선 왕조는 이후에도 계속 이러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명나라와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 수서령의 수서 목록에 포함된 고조선 관련 서적들은 이러한 입장에 역행하는 서적들인 것으로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거두어들이는 태도를 공식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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