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간다 다음 달에.
아버지께 먼저 이사를 공고받았을 때,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한국에 남을 것인가, 가족을 따라 중국으로 갈 것인가.
그때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둔 상태였다. 3년 동안 열심히 모은 내신으로 어느 고등학교를 갈까 고민했었는데, 그게 다 물거품이 되었다.
집 앞 가까운 학교냐 저기 공부 잘한다는 그 학교냐 저울질하던 내게 아버지는
중국.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는 중국을 제시하셨다. 인생에서 처음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축적해온 경험이 처음이었던 나는 갑자기 벙찌고 말았으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내 내신은 이제 쓸 곳도 없지만 그 억울함보다 설렘이 더 컸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본다는 설렘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현재의 나에게는 외국생활이 익숙하지만 그 당시 나는 정말 떨렸던 것 같다.
한국이 익숙하고 한국 말고 다른 곳은 꿈꾼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중국에서의 예정된 3년이 내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꿀지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혼자 살기는 조금 무섭다는 두려움과 중국이라는 새로움에 들떠있었다.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학교에서 영문 성적표를 받아왔다. 졸업식은 다음 달이었고 나는 아쉽게도 졸업식 전에 비행기를 타게되었다. 졸업장도 못받고 중졸이 된 것이다. 이 웃픈 이야기는 두고두고 국제학교에서 내 레파토리가 된다.
다행히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외국으로 가는 친구들이 또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독일로 간다는 같은 과학 동아리 회장님과 미국으로 언니와 간다는 우리 시장 따님 (그녀, 회장님과 나는 전부 다 같은 과학동아리에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초코파이를 쌓은 케이크를 반에서 같이 불고 교실을 나올 수 있었다.
초2부터 중3까지 살았던 집을 완전히 비우고 빈 집에서 이불 하나 깔고 잤던 그날밤이 생각난다. 이미 아빠는 먼저 중국에 가있고 엄마와 함께 집을 싹 비운 뒤 잤던 날이었다.
텅 빈 내 방에서 이불 한장 깔고 잤던 그 날은 엄마와 크게 싸운 날로 기억한다. 그리고 후에 친구에게 향수를 선물받은 날이기도 하다. 울며 내 설렘을 다 망치고 서러움만 준 엄마를 미워했었다. 다음 날 비행은 그다지 신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마주한 중국은 뿌연 미세먼지였다. 미세먼지로 유우우우명한 그 지역은 우울한 회색 하늘로 날 반겨주었다. 마스크 하나 없이 두툼한 미세먼지 공기를 받아마시며 나는 아빠와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