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은 중국이었으나…
처음 들어간 곳은 호텔이었다. 이렇게 중국에서 평생 하지 못할 호텔생활의 첫단추가 꿰어진 것이다. 번쩍번쩍한 금색 샹들리에와 붉은 벽지, 그리고 황금색의 장식들로 가득한 복도를 거닐었다. 아버지가 머물던 방에 엄마와 같이 살며 침낭에서 잤다. 한 사람의 비즈니스룸에 세 명이 산 셈이다.
내가 호텔에 살아본 적이 있는가?
없다. 그 당시에는 없었다. 그러니 풀 죽었던 내 마음이 다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복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카메라로 이 화려하고 웅장한 호텔 실내를 찍고는 했다. 그때 나는 4년 후에 다시 그 호텔에 머물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거기서 엄마와 지지고 볶고 살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중국에서의 내 4년이 항상 그런 것처럼. 언제나 상상이상이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다 말이다.
호텔 생활을 하며 밀렸던 유명 드라마들을 다 몰아본 것 같다. 문 밖이야 중국이었지만 말 하나 할 줄 모르는 내게는 방안이 더 편했다. 설레하며 온 새로운 나라였지만 난 여전히 이 곳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떠밀리듯이 처절한 적응 기간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국제학교 입학시험이었다.
중국에서 살았다고 하면 두 부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로컬이야 국제야? 혹은 중국어 할 줄 알아?!
이 중 첫번째가 같은 재외국민 경험자일테고 후자는 재외국민 비경험자일 것이다. 난 중국에서 살았지만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적응도 실상은 중국에 대한 적응은 아니다. 바로 국제학교 적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제학교 입학시험.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쿵 떨어졌다. 아무 곳에도 붙지 못할까봐 많이 걱정했다. 평화롭게 드라마를 보며 낄낄대던 내게 드디어 임무가 들어왔다. 바로 영어로 인터뷰를 준비하라는 임무가!
막상 나는 멍했다. 뭘 준비하란 말인가?
영어가 뭐 일주일 준비해서 짠하고 완성되는 것인가?
절대 아니지. 언어는 그렇게 허술하게 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호텔 로비에서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조각상들을 보며 푹신한 소파에서 앉아서 그저 마음만 졸이며 있었다. 로비에 차가 도착했을 때 침을 꿀꺽 삼키고 차에 탔다. 그리고 우리는 첫번째 국제학교로 떠났다.
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파란 눈의 백인을 독대했다. 말이 너무 인종 중심적인가? 보충하겠다. 한국에서 동한국인만 보던 나는 처음으로 저기 미국에서 온 미국인을 (인생 처음은 아니지만) 봐서 생김새의 차이 때문에 (안 그래도 가리는 낯을) 더 낯을 가렸다. 목구멍이 딱 막혀버렸다. 그 사회쌤은 계속 내게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통역까지 불렀으니 말 다했다. 그 날 인터뷰를 엉망진창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고나니 내게 가장 큰 적은 영어가 되었다. 얼굴전체가 민망함 때문에 시뻘게져가지고 차 뒷좌석에 다짐한 게 생각이 난다. 이 수모를 잊지 않겠다! 영어 내가 정복하리라!
그리고 나는 바로 그걸 실행에 옮겼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영단어책을 달달 외웠다. 그러면서 두번째, 세번째 학교에 시험을 보러갔다.
마지막 학교는 학교 크기부터가 어마어마했다. 멋있는 신축건물에 일단 눈이 갔다. 그리고 그 날 인터뷰도 야무지게 잘 마쳤다. 내 공교육 사교육 영어가 빛을 발한 것이다. 옆에 앉았던 아빠는 나를 보며 진심으로 놀라셨다. 언제 얘가 영어를 이렇게 잘했냐면서.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는 언어부터 배워야 하는 국제학교 쌩초보였다. 영어를 한다고 다가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인 것은 전혀 몰랐다. 일단 언어를 바꾸려고 하니 수학이나 역사를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얼굴이 화끈화끈했고 말 한마디 하려면 입에서 몇 번을 그 말을 굴려야했다. 누군가가 못 알아듣고 얼굴을 구기며 반문하면 덜컥 겁을 먹기도 했다.
언어란 더 손에 땀나고 침을 삼키게 하는 실질적인 시험이었다. 영어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한도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으나 일단 여기까지.
결국 마지막 학교로 정하고 나는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보는 먼지 가득한 중국 아파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