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실패시즌2_18화 / 미영
김 씨(김보라)와 다르게 밖에 잘 나가지 않고 나간다 해도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갈 뿐인 나는 에피소드가 정말, 정말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귀한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그때 나는 작업실에서 여느 날처럼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고 한 네다섯 시간쯤 인터넷 세상을 떠돌다가 '네가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시간은 집중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정말 딱 한 시간만 글을 쓴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그것도 밖에서.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같은 백수 처지인 친구를 불러 맥주와 저녁 식사 겸 치즈불닭을 먹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노동'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아주 먼 옛날, 노동이 인간의 생사로 직결될 때는 삶과 노동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계급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은 노동하지 않는 것이 부유층의 상징으로까지 연결될 만큼 저평가됐다.
그러나 이 계급사회가 사라지자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다'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개인에게 과도한 노동을 강요하게 됐고, 초창기 마약이 지금의 커피처럼 당연시됐던 것도 모두 노동의 괴로움을 금세 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계급사회는 사라졌지만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노동자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받는 연봉은 마치 노동에 대한 가치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노동이 아닌 노동력(노동자의 의식주는 물론이고 노동을 위한 재생산(재충전)의 시간 비용, 심지어는 차세대 노동자(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비용까지 모두 포함한 것)에 대한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임금이 '순수 노동'에 대한 비용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제목은 꼭 에세이같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을 적절히 비판하는 인문 서적)에서처럼, 지금 우리 사회의(사회 초년생의) 연봉이 노동이 아닌 노동력에 대한 비용이 되려면 '하루 네 시간 노동(지금의 절반)이 가장 적합하다'.
노동이 이처럼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지금의 이 시각(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다)에서 좀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루 네 시간은커녕 여덟 시간만 일하기도 어려운 이 사회에서 우리가 꼭 일해야만 하는 걸까? 일해야만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이런 대화를, 대화라기보다는 내 의견을 시시껄렁하게 피력하고 다시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나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친구는 오랜 백수 생활을 접고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기쁘게 축하해 줬다.
끝.
위에서 언급한 책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 따로 남긴다.
현재 임금 노동자 계급의 여성 해방 운동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지만 파시스트적 반동이 없는 한 꾸준히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조만간 여성들이 공동 취사와 보육원을 선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변화에 대한 바람은 절대로 남자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 설사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남성 노동자들이 자기 아내들의 지위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사회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