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음식이 먹고 싶다

개취존중의 길, 반려견 집 밥

by 배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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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앞에 초연해진 모습과 허겁지겁 꼬꼬마 시절 호두



사료 잘 안 먹는 강아지, 눈이 반짝이다


어이쿠- 저러다 코피 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그릇에 코 박고 사료 잘 먹던 꼬꼬마 호두는..


생후 1년이 지나자 깨작거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료로 바꿔주면 처음엔 잘 먹는 듯하다가 또 안 먹습니다. 열심히 이 사료 저 사료 시도해 봐도 버리는 게 반. 나중엔 '아주 배가 불렀네!’ 싶어, 일부러 간식도 잘 안 주고 어쩔 수 없이 사료를 먹게끔 만들어도 봤지요.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먹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1년여 후, 아기의 음식이 식탁 밑으로 떨어질 때마다 호두의 두 눈이 반짝반짝- 거립니다. 아, 뭔가 사냥하는 느낌으로 재밌나? 흥미가 유발되나? 그땐 그런 놀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식탁 밑의 사냥꾼



아기밥과 사료, 그 경계의 모호함


그렇게 또 1년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기는 여전히 식탁 밑으로 음식을 떨어뜨립니다. 평소 가공식품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무척 관찰하는 집사라, 사료에 들어가는 원재료와 아기식사 재료가 같아서 떨어진 걸 주워 먹는 호두를 제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아에 지쳐 있던 그 시기엔 '청소해 줘서 고마워'라는 마음이 컸지요.


집사에게 건사료와 아기밥의 차이는 식재료를 갈아 뭉쳐놓은 알맹이냐 원물이 보존된 형태이냐 정도로만 보였습니다. 그만큼 사료에 들어가는 원재료들은 익숙한 게 많습니다. 닭고기, 소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당근, 호박, 고구마, 브로콜리, 감자, 쌀, 귀리, 밀가루, 대두, 옥수수 등등. 익숙하지 않은 재료들은 대개 사람용 식품(전분, 기름, 고기)을 가공하고 남은 물질을 활용한 것들과 무기질 & 비타민 보충제, 기능성화합물, 보존제 정도였고요.


숨은 청소요정 찾기



사랑으로 만든 아기밥, 호두도 함께

후기 이유식을 마친 아기는 제법 밥과 반찬으로 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고기는 되도록 기름지지 않은 부위를 사용하고, 소금, 후추, 조미료와 같은 양념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채소는 볶거나 쪄서 부드럽게 만들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요.


음.. 근데 이거 강아지 화식 아니야..?



아기밥은 재료 본연의 맛과 향, 식감을 살려 만든 자연식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누가 먹어도 건강한 슬로우 푸드죠! 마침 호두가 저리 즐거워하니, 아기밥 만들 때 호두밥도 같이 만들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찌거나 볶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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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댕집밥을 만끽 중



음식을 먹은 호두의 변화


그릇에 구멍 뚫을 기세로 싹싹- 잘 먹습니다.


흥미로운 변화는 처음엔 안 먹으려 하던 채소들도 잘 먹게 된 점되려 사료를 잘 먹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채소는 먹다 보니 익숙해질 수 있다 쳐도, 편식이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안 먹던 사료를 잘 먹게 되다니... (그렇다고 사료만 며칠 연달아 주면, 또 안 먹지만)

그렇게 1년 넘는 동안 음식과 사료를 남기지 않는 호두를 보며, 아, 호두도 진짜 음식이 먹고 싶구나, 개도 음식 먹을 때 즐겁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리얼만 주구장창 먹으면 질리듯 말이죠!



이젠 너무 잘 먹어서 고민


집 밥과 사료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면서(지금은 7대 3) 사료가 주식이 아니게 되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영양 균형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반려견이 즐겁게 식사하길 바라서 시작했는데 정작 건강을 해치면 안 되니까. 좀 더 호두에게, 개라는 종에 맞는 식사(주식)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제 집사는 호두의 집 밥을 안도하는 마음으로 주고 싶습니다.


20241122_143239.jpg 성견을 위한 자연식 재료: 애호박, 고구마, 당근, 손질 생선, 소 간, 닭 가슴살, 닭 심장, 말린 미역, 난각가루, 아마씨, 해바라기씨, 귀리쌀



개를 위한 집 밥 레시피? 만들면 되지


드디어 집사가 걸었던 배움의 흔적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걸까요. 현재의 삶에 묻혀 고이 덮어두었던 학부 전공, 식품영양학.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이로운 영향보다 독성 영향이 궁금해서 시작한 석사 시절의 연구, 예방의학. 데이터 분석이 필수였던 직장 생활에서 연마된 엑셀 기술, VLOOKUP.


오로지 호두를 위한 영양 균형 식사를 만들려고 탐구자 모드를 ON 시켜봅니다.

(이렇게 활용할 줄이야)


다행히 ‘개를 위한 영양지침’이라는 영양소가 수치화된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 국립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 NRC)에서 발행한 '개와 고양이를 위한 영양지침(2006)'은 미국사료관리협회(AAFCO)와 유럽펫푸드산업연맹(FEDIAF)에서 제시하는 영양지침의 근간이 되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다만 AAFCO와 FEDIAF는 사료로서의 특성을 고려하여 불특정 다수의 개와 고양이들이 영양 결핍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마진’을 적용하여, NRC보다 좀 더 높은 영양 요구량을 권장합니다. 집에서 만드는 호두의 밥은 사료와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아래 이유로) NRC(2006)의 영양지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NRC 영양 지침을 따르는 이유

-식재료의 품질 우수(원료물질 그대로 사용, 분말화 X, 찌꺼기 X)

-저가공 조리(영양소 파괴 최소)

-소화흡수율이 건사료보다 5-10% 높음(위의 2가지가 주된 이유)

-저장기간 짧음(영양소 손실 최소)

-기호성이 높음(음식을 남기지 않음, 영양소 섭취량 충분)


사람 구경하는 호두 구경하기


개취존중의 길


이제는 하나 둘 모자란 영양소를 채우기 위해, 닭 심장, 소 간, 해바라기씨앗, 난각 가루 등등 사람에겐 생소하지만 개에게 맞는 재료들을 넣어줍니다. 호두가 잘 먹는지, 다른 이상 반응은 없는지 확인해 가며 호두의 취향과 영양 균형을 맞춘 개취존중 집 밥을 만듭니다.


사람의 삶에 비해 너무 짧은 그들의 생이 좀 더 즐겁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댕집밥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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