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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도사 Jun 07. 2023

제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애니메이션 상영작 감상


이 글은 제2회 서울국제한국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된 작품 15편을 감상한 기록이다. 감상 직후 순간순간 떠오른 생각을 트위터에 남겼고, 여기에 몇몇 부분을 간단하게 다듬고 덧붙였다. 작품 스틸컷은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스포일러가 있는 감상들도 있다.


오성윤, 〈불꽃놀이〉, 2020


산 속에 파묻힌 쓰레기들이 해맑게 여행을 떠나는데, 이들의 정체가 짐작될 수록 순진무구한 얼굴들은 불안을 자극한다. 이 쓰레기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하나같이 녹슬어 산에 버려지는 쓰레기들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쓰레기들이 한데 모여 불꽃으로 터지는 순간, 그 충격은 극대화된다. 어쩌면 이 작품은 독립애니메이션계의 〈킹스맨〉 아닐까? 오성윤 감독의 작품을 좋다고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불꽃놀이〉는 탄탄한 스튜디오를 이끌며 수작을 만들어 온 감독의 저력을 보여준다.


무기산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쓰레기를 만드는 산업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밀키트와 배달음식을 먹고 버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 어떤 자본가와 정치가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부의 증대만을 위해 무기공장을 돌리고 전쟁을 촉발하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파괴한다. (물론 자본가와 정치가가 무기를 만들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킹받을 것이다.) 〈불꽃놀이〉에 등장하는 무기들은 각양각색이지만 오랫동안 버려졌는지 군데군데 녹슬었다. 안보를 위해 사용되었을 무기들은 전쟁이 끝나고 몇 십년이 지난 뒤에도 안전을 위협한다.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인간은 물론 동물과 자연까지도. 이 작품은 비무장지대 뿐 아니라, 지역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있다는 현실의 불안감을 환기시키며, 타자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만든다는 프로파간다를 해맑게 반박하며 무기들의 대량생산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드러낸다.

 


에릭 오, 〈오페라〉, 2020


세계의 계급 건설을 웅장하게 보여준다. 이안 쳉 작품들의 웅장한 세계관이나 〈설국열차〉의 단계적 구조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오페라〉의 피라미드 구조는 까마득하게 높고 뚜렷하게 구획되어 절망만 안겨준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무관심한 채 기꺼이 부품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혁명은 꿈꿀 수 없을 것이다.



김주임, 〈나무 사이로 계절이 지나가〉, 2022


예쁘게 만들어진 에세이책을 선물 받아 읽을 때의 기분 좋은 즐거움이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자연 속에서 상상의 존재들을 마주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판타지 서사는  도회적 삶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브리의 컨셉아트를 떠올리게 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1인 창작자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낼 때, 창작자도 관람객도 즐거울 수 있는 작업은 이런 작품인 것 같다. 사실 이 말인 즉슨 일러스트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과 연결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무 사이로 계절이 지나가〉는 게으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동명의 그림책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것이기도한데, 책에 사용된 그림들의 레이어 일부를 좌우상하로 조정하고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에 의존한 작업을 웹툰 트레일러 광고 영상들과 어떻게 차별화해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성민, 〈부엉이 심포니〉, 2021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한 인간들이 지구를 떠난 후 동물원 속 동물들의 이야기. “인간들의 보살핌을 받던 동물들은 자기 주체성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라는 내레이션에 이어 남겨진 동물들을 비춘다. 우왕좌왕하던 동물들이 음악 통해 서로를 돌보며 하나가 된다. 다양한 동물들이 본연의 움직임에서 벗어나, 낯선 도구를 통해 인간적 습성을 배워가는 모습들을 보는 묘미가 있다.


하지만 〈부엉이 심포니〉는 얄팍하다. 동물들의 의인화된/인간의 습성을 배워가는/동물 본연의 움직임들이 무분별하게 교차되어 작위적이고,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 데 반해 액팅 자체도 특색이 없어 더욱 일차원적으로 느껴진다. 서사에서 보여주는 오만한 관점은 이러한 시각적인 결점을 부각한다. 동물원의 양가성에 대한 최소한의 리서치만 진행했더라도 동물들의 관점으로 끌고 가는 작품에서 "인간들의 보살핌"이나 '동물들의 주체성 상실'을 쉽게 거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작품 속 동물 모두가 아무 고민 없이 인간을 따라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동물들의 자기 주체성"은 애초부터 없었을 테다.

 


김수정, 〈렛츠고! 썸머바캉스〉


3-4년 전부터 국내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에서는 시티팝이 유행했다. 〈렛츠고! 썸머바캉스〉는 배경이 시골 계곡임에도 묘하게 시티팝 분위기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뒤섞여있다. 정확히는 이런 일본식 레트로 스타일을 차용해 감독 자신의 스타일로 성공적으로 변주해낸다.

 

남녀 커플이 나오는데, 열혈하게 액션을 주도하는 역할과 이를 보조하는 역할이라는 일본 소년만화의 히어로-히로인 공식을 충실히 '반전시켜' 따른다는 게 유쾌하다. 어느 산골(?)에서 사건이 터지고 주인공들이 경쾌한 액션을 보여주는데 〈명탐정 코난〉이 생각나면서도 훨씬 더 스펙터클하고 리듬감 넘친다.



신수연, 〈봄이 오는 날〉


올해 본 작품 중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고 섬세한 작품. 너무 좋다! 완벽해! 진부한 형용사 밖에 반복할 말이 없네. 용기와 연대의 메세지는 어떤 매체든 단골로 등장하는 흔한 메세지지만, 작품의 미학적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극에 달할 때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단순한 메세지로 관람객을 감동시키게 하는 좋은 작품의 힘은 이런 것이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지원을 몰빵하고 싶다면, 이런 작품에 투자를 왕창 해줘야 한다!



양현서, 〈샤이닝 나이트〉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모험을 떠나는 귀여운 동물 이야기는 하나의 장르가 된 것 같다. 〈샤이닝 나이트〉는 반짝이는 세계의 잔인한 이면을 보여주는 흐름을 선택하면서, 사랑스러운 존재와 감성이 파괴될 때 배가 되는 충격을 효과적으로 공략해낸다.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환경을 중시한다는 전광판의 슬로건은 전광판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자원을 떠올리게 하는 블랙 코미디인데 이렇게 중간중간 배치된 요소들이 재밌다. 다만 배경에서 한문,영문,일어 혼용은 오히려 불필요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크레딧 흐름이 과도하게 빠른 느낌.



빙소정, 〈바다가 보고 있어〉, 2021


재개발과 환경 문제를 리틀 포레스트식으로 다뤄내는 청량한 판타지. 작품 서사 자체도 판타지를 근간하지만, 그보다는 저렇게 해맑고 순수한 9급 남성 공무원이 있다는 것이 판타지이기도 하다. 지극히 한국적인 해변 마을 배경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특성이 두드러진다. 평범할지도 모르는 일상 저변에 깔린 재난을 깨닫고 치유를 시도하는, 신카이 마코토로 대표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흐름에 부합하는 서사와 감성을 연상시킨다. 공감능력은 있지만 타성에 젖은 성인 남자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여학생의 조합 역시 일본 픽션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 공식이라 일본적 분위기를 더욱 강화한다. 여러 명작들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준 면면들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착화된 젠더 공식까지 답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슬기, 〈바다꿈〉, 2021


자취를 하는 주인공이 바다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는 이야기. 기술적으로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름다운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마음을 쓴 흔적들이 작품을 빛나게 한다. 특히 관람객을 끝까지 붙잡는 촘촘한 구성이 돋보인다. 반짝이는 소라껍질이나 무심코 버린 까만 기름 같은 작품 초반의 복선들을 바다 풍경의 요소들과 연결하는 부분들도 매끄럽다. 서사에 초점을 맞춘 단편 애니의 경우 의외로 짧은 시간 동안 관람객의 집중력을 붙잡기가 쉽지 않아 구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바다꿈〉은 이런 부분에서 힘이 있다.



노아 에르니, 〈절약의 발명〉, 2021


간만에 봐도 재밌고 귀여운 우화! 지구온난화, 무분별한 기술발전과 불필요한 대량생산, 난민과 노동, 육식.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화두들을 지루하거나 과하지 않게 늘어놓는다. 애니메이팅이 섬세하진 않은데 포인트를 잘 포착해내고 카메라 워킹이 세련됐다.


위고 카비 Hugo Caby, 앙투안 두프리에 Antoine Dupriez, 오뱅 쿠비아크 Aubin Kubiak, 뤼카 레르마이트 Lucas Lermytte, 조이 드비즈 Zoé Devise, 〈얼음 없는 집 Migrants〉, 2020


얼음이 녹아 난민이 된 북극곰 소재는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동물을 의인화 시키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으로 북극곰은 환경과 난민 문제를 이중적인 시각적 상징으로 다룰 수 있다. 작품에서 동물들을 인형으로 표현하며 두는 의미는 특히 탁월하다. 천의 취약성. 상처를 덧댈 수 있지만 온전해지지 못하고 남아버리는 흉터. 보금자리를 잃은 북극곰들은 상처입고 여기저기 기워진 채로 낯선 곳에 도착한다. 그에 대조적으로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곰들 역시 기워지고 헤진 채로 폭력을 드러낸다. 이들은 천 혹은 밀집으로 만들어졌는데 몸 여기저기가 날을 세우듯 쭈뼛쭈뼛 일어나 있다. 폭력적인 곰들은 환경과 난민 문제에 화를 내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자국 빈곤층(그리고 빈곤하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은 살기도 힘든데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생산 비용을 아끼기도 힘든데 환경 비용을 강요당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그 분노는 권력이 아닌 더 취약한 사람에게 향한다. 폭력적인 사람들이 역시 폭력 당해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동정적인 감성을 배제하고서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디테일들이 놀랍다.


기옘 미로 Guillem Miró, 〈구운 생선 Baked Fish〉, 2019

 

조용하게 웃기다가 소름이 쫙 돋는다.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고 헤엄치는 플라스틱을 보며 '애니메이션'이 생명을 부여한다는 뜻을 담은 단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페트병에 물고기를 빙의시켜 플라스틱 쓰레기를 향한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니콜라 드보 Nicolas Deveaux, 〈1시간에 1미터 1Meter/Hour〉, 2018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비행기 위에서 달팽이들이 밤낮으로 춤춘다.생각해보면 달팽이는 유연함과 단단함을 모두 가진 생물이다. 달팽이들의 점액, 비행기 구름, 유성이 빚어내는 시간선의 하모니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건 그렇고 이 작품에 진짜 달팽이는 한 마리 뿐이라고 한다나? 고도의 CG로 실사화하든 귀엽게 데포르메로 구현하든 애니메이션은 동물을 괴롭히지 않고서도 기분 좋은 환상을 보여주는 장르인 것이다!


다체 리두제Dace Rīdūze, 〈완두콩의 모험 Pea children〉, 2020


오래 전 서구 동화들은 콩알들에 오명을 씌웠다! 안데르센은 완두콩들을 세상에 풀어두면 연대하지 않고 무한경쟁만 일삼다 자멸하게 했고, 매우 인간중심적이게도 소녀를 돕는 완두콩만 살려줬다. 그외에도 '잭과 콩나무'나 '공주와 완두콩'에서처럼 콩들은 발판이 되거나 침대에 깔린 채 도구로 이용만 당해왔다. 리두제는 작고 여린 완두콩들을 인간에게서 해방시켜 서로서로가, 그리고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특히 아가콩들에게 들려주는 자장가의 달콤한 선율이 더해져,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몽글몽글하다.  


리두체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20년이 넘는 관록은 이렇게 드러난다. 실제 돌과 물, 펠트로 만든 인형, 아마도 3D 프린터가 사용됐을 다양한 오브제들이 위화감 없이 조화를 이룬다.화면은 고전적인 스톱모션 기법을 이어오지만 촌스럽지 않고 동화 서사를 따라가지만 익숙한 동시에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거장의 길을 걸어가는 중진의 저력은 축척된 경험과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에 근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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