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캐가 아닌 부캐, 나 아닌 또 다른 나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모습이 있다.
사회적으로 보이는 혹은 나타나는 모습 말고 자신 안에 감추어 둔 내면의 모습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쪽 면을 보여 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본캐가 아닌 부캐들이 있는 것처럼 부모님이 정해주는 이름이 아닌 SNS 상에서 불리는 닉네임으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모습들이 있다.
2015년 MBC드라마 '킬미 힐미'에서 배우 지성이 연기했던 차도현이라는 인물은 다중인격자다. 자신을 포함해 여섯 명의 인격이 한 남자 안에 공존해 살고 있다. 신세기, 페리박, 안요섭, 안요나, 나나, Mr. X라는 인격으로 차도현 안에서 함께 살고 있다. 배우 지성이 연기자로서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 준 배역이라고 했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이 역할 속의 인물들을 표현하면서 배우로서 삶의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해에 이 역할로 지성은 MBC 연기 대상을 받았다.
방영되었던 시기에 드라마를 보면서 차도현처럼 내 안에 다중의 인격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얼마 전 서로 이웃인 M님의 블로그의 포스팅을 보기 전까지는.
다시 보기로 ‘킬미 힐미’를 시청했다. 나 역시 역 중의 인물 차도현처럼 사람들이 인정하고, 인정받고 싶은 모습의 인격만을 내세우면서 남들 눈에 무력하고 주눅 든 모습은 숨겨 두고 있었다.
용기 내어 숨겨진 모습들을 찾아봤다. 덮어 두고 닫아 두었던 인격들을 찾아보면서 차도현이라는 인물이 자신 안의 인격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내 안의 인격들을 보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숨어 있었으나 감추지는 않았던 인격들을 찾는 일은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처럼 두근거리고 재미있다.
숨바꼭질 놀이의 술래가 되어 ‘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찾았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알고 있는 본능에 충실한 욕망덩어리 X, 작가의 꿈을 좇아 작업실에서 글을 쓰는 작가 R,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은 N, 쌍둥이 N과는 달리 삶이 늘 활기차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 호기심도 많은 여고생 T, 실수투성이에 사고뭉치인 어린 스몰 b, 세상과 맞붙고 싶은 막무가내 아저씨 U, 재력가인 우아한 노부인을 꿈꾸는 나이 많은 여자 Y가 보인다.
덮어두고 닫아 두었던 인격들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남들 눈에 괜찮아 보일 것 같은 인격만을 찾아서 내세우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말마다 친정 집에 간다. 평소 가족들이 알고 있던 B모드를 장착하고 가끔은 호기심 많은 활달한 여고생 N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방이 고요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시간 동안에는 작가 R이다. 하루 한 꼭지 마감을 지켜야 하는 작가 R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글쓰기 프로젝트 덕분에 창작의 고통을 겪고 있다. 늘 해오던 새벽 필사 대신 엉덩이로 글을 쓰고 풀어내는 작가 R로 살 수 있는 새벽 시간이 필사의 시간보다 힘들지만 행복하다.
새해가 되고 부부싸움할 때 튀어나오는 막무가내 아저씨 U의 출현빈도가 낮아지고 있고 대신 욕망덩어리 X가 자주 출현한다. 작년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온 B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나타나는 X의 잦은 출현은 B에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가끔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을 때 집에만 있는 N과 실수투성이에 사고뭉치인 어린 스몰 b가 나타나 마음을 휘저어 놓을 때도 있지만 오십육 년을 세상과 함께 잘 살아온 평소의 B가 버티고 있어 별 문제가 없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차도현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드는 신세기의 등장방식이 아니라 내 의지에 따라 본캐와 부캐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며 삶을 다양하게 만드는 일은 스스로에게 해롭지는 않다고 본다.
혹여나 내 안에 있는 부캐들이 본캐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가족과 친구들이 걱정을 할 수도 있지만 본캐를 위협하는 부캐가 아니라면, 있지만 없는 부캐로 가끔 본캐가 불러 내주는 부캐라면 ‘벗’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존재들이다.
스스로에게 선물이 필요한 시간의 욕망덩어리 X. 새벽 시간의 작가 R.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아는 N. 성장하고 싶은 시간의 여고생 T. 나를 보호해 주는 시간 속의 아저씨 U. 실수의 시간을 견뎌낼 줄 아는 스몰 b. 우아한 여인의 시간을 꿈꾸며 살아가는 Y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삶이 다채롭다. 다양한 내 안의 부캐들과 같이의 가치를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시간이 본캐의 B에게 유쾌한 시간을 선물한다.
일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이 닥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피할 수 없고 대놓고 맞서 싸워야 할 때 한결같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은 새로운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 찾아보면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아니면 덮여 있어서 몰랐던 부캐가 있을 수 있다. 나가서는 안된다 막지 않고 내 보내 주는 시간을 가지면 그동안 몰랐던 부캐를 만나는 벅찬 경험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