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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빈 Aug 29. 2023

 블랙빈에게 쓰다

10 분기점과 압력-직장,가정,연인을 떠날지를 고민했던 경험에 대해 쓰라

결혼하고 보따리를 쌌던 적이 있다.


임신 8개월에 남편의 발령으로 여자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인천에서 진해로 이사를 했다. 친정인 부산과 자동차로 한 시간 반거리에 위치해 있는 진해라는 낯선 곳이 인천보다는 근거리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1991년 7월, 진해의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다. 하혈로 고생한 탓에 산후까지 꽤 오랜 시간 여자의 몸은 회복이 되지 않아 힘들었지만 자주 찾아오는 친정식구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지냈다. 몸도 마음도 적응되면서 낯선 도시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나라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고 보내주는 곳에 가서 살아야 하는 삶이지만 여자가 선택한 삶의 자리에서 남편과 아이를 키우며 알콩달콩 살았다.


11월 남편이 대학원에 입학하고 싶다며 입학시험을 보고 싶다고 했다. 시험 친다고 다 입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험에 덜컥 합격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서울시 은평구 수색동에 위치한 15평의 국방대학원 아파트 5층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지역적인 거리도 심리적인 거리도 친정인 부산과 너무 멀었다. 무엇보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2년의 석사과정을 마쳐야 하는 곳에서 살 생각을 하니 여자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했고, 기분은 한없이 적적했다.


겨울의 서울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난지도가 지금처럼 공원이 아니었던 시절이라 쓰레기더미에서 불어오는 메탄의 바람은 불쾌했다. 낡은 아파트의 5층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울 것이 자명해 보였다. 이삿짐을 풀며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살아야 할 이곳이 스위트 홈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고 남편은 새롭게 시작하는 대학원 공부를 하느라 아내와 아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여자와 아들은 남편의 눈밖이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전공서적과 논문이 많았고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로 작성해야 하는 리포트는 쌓여있었다.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니 옆에서 보기에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수업 듣고 과제를 하느라 진이 빠져가는 남편의 모습이 가끔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참았다.


5월이 되고 굳게 닫아두었던 창을 열었다. 봄바람의 싱그러움 대신 난지도의 쓰레기 바람이 들이닥쳤다. 봄이 완연해지고 더운 여름날이 와도 창을 마음껏 열 수가 없었다. 땀띠 나는 몸을 견디고 가을을 맞고 겨울이 되기까지 여자와 아이는 메탄의 바람에 늘 시달렸다. 감기와 잔병을 달고 살았던 아이로 여자는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 더 많이 안쓰러웠다. 무엇 때문에 고약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하숙생이었고, 여자는 밥 해주고 빨래해 주는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하숙집 주인아줌마였다. 답답했다. 이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무작정 옷가지를 보따리에 챙겨 아이를 들쳐 안고 집을 나왔다.


자주 오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며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무작정 탔다. 서울역이 아니라 신촌으로 가는 버스였다. 이대 앞에 내렸다. 남편이 아이를 봐줘야만 갈 수 있었던 이대 앞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배가 고파 찾아든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집을 나서며 가졌던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품 안에서 순하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아이도 여자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무너뜨릴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세상이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았고 살고 살아낼 여자가 만든 세계였다. 머리길이가 짧아진 만큼 머릿속이 간결해졌다. 답답함이 풀어졌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어갔다. 남편의 메모가 식탁 위에 있었다.


아침에 짜증내서 미안했다고 사랑한다는 말이 적힌 남편의 간단한 쪽지였다.


보따리를 싸고 챙겨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더라도 남편과 헤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짧은 친정나들이로 마음의 기력을 회복하고 돌아왔을 테지만 여자의 마음에 보따리를 쌌던 기억이 상처와 흔적으로 오래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날은 서울역이 아닌 신촌가는 버스가 왔고, 그것을 탔고, 이대에서 내렸다. 머리를 자르고 아이와 둘이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그렇게 둘만의 짧은 일탈의 시간을 가졌다. 보따리가 만들어 낸 행동이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회피의 수단이 아닌 스스로를 충전하는 법을 알게 한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 이렇게 직장, 가정, 연인을 떠날지 말지 고민했던 경험으로 글을 써야 할 때 떠오르는 해프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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