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무언가를 거부하면 그 안에 담긴 선물도 받을 수 없다
여자의 글쓰기는 갱년기로 시작되어 우울증으로 끝난다.
삶에서 찾아온 갱년기 우울증에 무력해진 자신을 전가시켰다. 모든 것이 그냥 하기 싫었다. 그 하기 싫은 핑계를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혹은 무엇 때문이라는 구차한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해서 여자는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무기력한 나는 나의 갱년기가 만들어낸 호르몬의 불균형 덩어리다.’라고.
세뇌가 불러온 마음의 허물어짐이 몸으로 나타나니 여자가 여자를 그리고 남편과 아들이 여자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쌩떼 같은 고집을 부렸던 적이 없던 여자는 스스로 갱년기 우울증에 휘청거리는 중년의 주부라고 자신을 단정 지었고, 남편과 아들도 인정하게 만들었다. 나무늘보처럼 지냈다. 느림의 미학 속에 빠져 두 계절을 살았다.
빈둥거리며 나태하게 지내는 자신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스스로 방법을 찾았다. 바람 부는 곳을 걷기도 하고,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때뿐이었다. 마음의 공허함이나 불쑥불쑥 일렁이는 마음의 울렁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고 아무 말이나 쓰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 내내 ‘화가 난다’, ‘짜증 난다’로 채우기도 하고, 여자를 분노케 하고 짜증 나게 만드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적어가며 욕을 하기도 했다. 무작정 썼다. 문맥과 맞춤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음에 있던 울화를 끄집어냈다.
엉킨타래가 조금씩 풀어가면서 안에 꼬여있던 것들의 처음을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가 않았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찾으면 찾을수록 모든 화살이 여자를 향해 있었다. 모든 책임이 자신에서부터였다. 더 화가 났다. 결국 노트를 찢어 버렸다.
다시 걸었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일어나 음양탕 한 잔 마시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집 앞 산책로에서 대청공원을 거쳐 장산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마음이 헝클어지면서 허물어졌던 몸부터 챙겼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나뭇잎들과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더없이 넓은 하늘을 날다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새들의 을음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쪼그라졌던 몸이 펴졌다. 다시 마음에 있던 것들을 꺼내 적었다.
처음처럼 무작정 노트에 휘갈기듯 쓰지 않고, 은유의 『쓰기의 말들』의 도움을 받았다. 104개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글을 필사하고 필사한 문장에서 단어를 잡아 단문으로 내 감정을 적었다. 친구는 글이 아니라 말하기를 추천하며 마음을 다독이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했다. 모르는 타인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주저리주저리 자신을 보여주기가 싫었던 여자의 고집을 친구는 꺾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 대신 자신과의 대화를 글로 했다.
갱년기 우울증으로 시작된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시작된 글쓰기가 8월 책이 되었다.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고 결과였다. 함께 하는 즐거움이 가치가 되어 특별하고 소중한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자신의 책을 출간하며 여자는 몰랐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